홍종철 (189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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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철'''(洪鍾轍, <small>일본식 이름:</small> 洪海鍾轍, [[1890년]] [[4월 25일]] ~ [[1973년]] [[4월 29일]])은 [[일제 강점기]]의 기업가, 사회 활동가이다. 본관은 [[남양 홍씨|남양]]이며,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출신이다. 아버지는 홍재삼(洪在森)이고, 어머니는 진대기(陳大基)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으며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인 [[홍영표]]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본관은 [[남양 홍씨|남양]]이며,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출신이다.
 
아버지는 홍재삼(洪在森)이고, 어머니는 진대기(陳大基)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인 [[홍영표]]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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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4월 1일 전라북도 관선 도평의회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30년]] [[6월 3일]]부터 [[1933년]] [[6월 2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1933년 2월에는 고창고등보통학교 전무를 역임했고 1933년 5월 11일과 [[1937년]] [[5월 11일]]에는 전라북도 관선 도회의원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9월에는 광주세무감독국 정읍세무서 소득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35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시정 25주년 기념표창과 은배 1조를 받았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홍종철은 일제 강점기에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인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았고 1937년에는 370여 정보의 땅정보(=약 111만 평)의 땅을 소유한 전라북도 고창군의 거부였다고 한다. [[1935년]] 7월에는 전라북도회의원 만주시찰단의 일원으로 만주를 방문했다. [[1936년]] 6월에는 정읍국자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고 [[1939년]] 11월에는 고창요업주식회사 사장과 고창흥산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다. [[1940년]] 2월에는 대흥광업주식회사 이사와 대흥상사주식회사 이사를, 1940년 12월에는 전라산업주식회사 이사를 역임했다. [[1941년]]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전라북도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광복 이후인 [[1949년]] [[8월 6일]]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지만 같은 해 [[8월 31일]]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56년]]에는 홍해제염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 설립 과정에서는 300원을 기부했고 광복 이후에는 한성여자중학교 재단 설립 과정에서 약 165.29㎢(약 5천만 평)의 토지를 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