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트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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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2세'''({{llang|de|Ferdinand II}}, [[1578년]] ~ [[1637년]], 재위 기간 [[1619년]] ~ [[1637년]])은 [[신성 로마 제국]]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황제]]이다. [[보헤미아]]의 국왕 '''페르디난트 2세'''({{llang|cs|Ferdinand II.}}),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 '''페르디난드 2세'''({{llang|hu|II. Ferdinánd}}, {{llang|sk|Ferdinand II.|페르디난트 2세}}, {{llang|hr|Ferdinand II.|페르디난드 2세}})에 해당한다.
[[페르디난트 1세 (신성 로마 제국)|페르디난트 1세]]의 손자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오스트리아의 카를 2세|카를 2세]]의 아들이다. [[반종교개혁]]의 전형적인 군주이다. [[예수회]]원들에게 교육을 받은 그는 전제주의자이자 예수회파였다. 그는 황제에 선출되자마자 개신교 탄압에 앞장 섰다.<ref>《브리태니커 백과사전》</ref>
[[마티아스]]와 [[루돌프 2세 (신성 로마 제국)|루돌프 2세]]와는 사촌간으로, [[1617년]] [[보헤미아]] 왕, [[1618년]] [[헝가리]]의 왕이 되어 [[프로테스탄트]]를 압박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재건에 노력했다. 그 때문에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들은 가톨릭교도인 그의 폐위를 선포하고 팔츠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5세]]를 옹립하여 [[30년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1619년 황제가 되어 내외의 가톨릭 세력의 원조를 얻어(이 당시 [[얀 예세니우스]]를 처형했다), 1620년 바이센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를 격파하고, 보헤미아에 합스부르크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이어서 [[발렌슈타인]]을 기용하여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의 세력을 내몰아 한때는 전독일을 제패했다. 1629년 개신교인들에게 빼앗겼던 가톨릭 교회 재산을 복구시킨다는 [[복구령]](Edict of Restitution)을 내리며 개신교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스웨덴 왕 [[구스타프 아돌프]]의 침입 및 그에 대한 프랑스 프로테스탄트의 원조로 그의 기도는 좌절되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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