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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문과로 급제하였고 내각총리대신에 올랐으며, [[을사조약]], [[기유각서]],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폐망시켰다. [[정미 7조약]]에 서명해 행정권을 일제에 이전하였고, [[1909년]]에는 독단으로 [[기유각서]]를 교환하여 일제에 사법권을 넘기고 결국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이르렀다.
 
창씨명은 '''리노이에 칸요(李家 完用)'''이며 , 일본제국에서의 작위는 [[후작]]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조선사 편수회]] 고문 등을 지냈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를 내세운 일제의 각종 내선일체(内鮮一體) 관련 정책에 찬동하여 전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 간의 혼인을 강제하였다. 그는 사후 [[전라북도]]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에 묻혔으나, 광복 이후 지속적으로 묘가 훼손 및 방치되다가 1979년 직계 후손들에 의하여 화장되었다.
 
== 출생과 가계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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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얼마간 집에 들어앉아 요양을 해 어느 정도 호전됐다. 그래서 [[1926년]] [[1월 12일]] 오전 10시 총독부에서 열린 중추원 신년 제1회 회의에 다소 무리를 해 참석하게 된다<ref name="yun" />{{rp|350}}. 조선 총독부는 그해 1월 1일 경복궁 안에 신축한 청사로 이전해 있었으며, 조선 귀족 등록관청인 중추원도 새 청사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 총독부는 새 청사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 正毅) 초대 총독이 입안했고,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 好道) 전 총독(2대)이 착공한 이래 9년만에 완공을 본 당시 동양 최대의 건물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완용은 새 청사에서 열린 새해 첫 회의인데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도 참석한다고 해서 무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그의 병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키고 말았다. <ref name="yun" />{{rp|350}}. 부축을 받고 귀가 후 밤이 되자 기침이 손쓸 수 없을 정도가 됐고, 이내 졸도해 며칠간 고열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졌다. [[2월 11일]] 오전 오늘이 고비라는 소식을 들은 순종은 적포도주 한 상자를 이완용의 집으로 보냈다<ref name="yun" />{{rp|350}}. [[1926년]] [[2월 11일]] 오후 1시 20분 이완용은 옛 주인이 보낸 적포도주를 입에 대보지도 못한 채 일본인 의학 박사 두 명과 조선인 주치의, 그리고 그의 의붓형 [[이윤용]]과 차남 [[이항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옥인동 집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69세. 장손 이병길은 일본 유학 중으로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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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그가 이재명(李在明) 의사(義士)의 칼을 맞고 입원중, 자신을 간호하던 맏며느리 임건구와 간통을 하여 장남 이승구가 자살하였고, 며느리는 이완용이 첩처럼 데리고 살았다는 패륜적 성추문<ref>[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651 "이완용 불륜 때문에 아들이 자살?"] --미디어오늘 2006년 9월 1일자 기사</ref> 마저 기록돼 있다. 그런데 친일파 문제를 연구해온 윤덕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에 따르면, 이완용이 [[며느리]]와 불륜을 저질러 아들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사실이다. 윤덕한 연구원에 따르면, 이승구는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이전인 1905년 음력 7월, 자살이 아니라 병으로 죽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이승구는 사망 당시 26세였다. 며느리와의 불륜설도 잘못된 사실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이자 [[매국노|매국]]노인 이완용을 배척한 [[민중]]들의 감정이 담긴 이야기일 뿐, [[술]]과 [[이성애|이성]]을 멀리하고 [[서예]]와 [[읽기|독서]]를 하는 사람이었다.
 
이완용의 손자이자, 죽은 둘째아들을 대신하여 장손으로 입적한 자인 이병길도 친일파였다.이완용이 죽은 뒤, 일제 후작 작위와 전재산을 상속 받은 병길은 조선귀족회 이사와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 등을 지내며 일제에 적극 협력했다. <ref>{{뉴스 인용|url=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651#csidxf27fee78cf855a99bf3fad1e981cf59|제목=이완용 불륜 때문에 아들이 자살?|성=미디어오늘|날짜=2006-09-01|뉴스=미디어오늘|언어=ko|확인날짜=2018-07-19}}</ref>
넷째, 위의 긍정적 평가의 이면엔 과연 무엇을 위한 타협이었나라는 근본적 의문이 존재한다. 나라가 없이 왕실이 무슨 소용이며 대다수 양반들 역시 일반 국민과 마찬가지로 구차하고 고생스러운 삶은 마찬가지였고, 더욱이 일제에 착취당하며 곧 강제징용 및 [[일본군위안부]] 등으로 학대당하게 될 백성들의 삶은 애당초 왕실과 친일파들의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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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조 : 이명빈(李命彬) - 생부는 이렴(李濂)
******고조부 : 이뢰(李耒, 1733~1756) - 명릉참봉(明陵參奉),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증직. 생부 이제원(李濟遠, 1709~1752)은 1736년 문과, 대사간이고, 생조부는 도암(陶庵) [[이재 (1680년)|이재]](李縡, 1680~1746)
******고조모 : 해평윤씨(海平尹氏, 1732~1809) -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윤득경(尹得敬, 1702~1742)의 딸. 1726년 진사, 1736년 문과
*******증조부 : 이광유(李光裕, 1761~1800) - 1783년 생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 생부는 이숭(李崧)
*******증조모 : 안동김씨(安東金氏) - 군수 김이인(金履仁)의 딸. 이조판서 [[김희순]](金羲淳, 1757~1821)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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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부 : 이호준(李鎬俊, 1821∼1901) - 1864년 문과, 판중추부사. 시호는 충익(忠翼). 생부는 이해(李垓).
*********양모 : 여흥민씨(驪興閔氏) - 증 좌찬성 민용현(閔龍顯, 1786~?)의 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4대손.
**********부인 : 양주조씨(楊州趙氏) - 조병익(趙秉翼)의 딸. [[조민희 (1859년)|조민희]](趙民熙, 1859 ~ 1931)의 부친, 이조판서 조재순(趙在淳, 1807~?)의 아들이고, [[조병세 (1827년)|조병세]](趙秉世, 1827~1905)의 사촌(四寸).
***********장남 : [[이승구]](李升九)
***********큰며느리 : 임건구(任乾九, ?~?) - 풍천임씨(豊川任氏) 임대준(任大準, 1857~?)의 딸. 1882년 문과, 영변 부사(寧邊府使)를 지냄. 정미칠적(丁未七賊) [[임선준]](任善準, 1860~1919)의 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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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從孫) : [[이병옥 (1913년)|이병옥]](李丙玉, 1913~1989) - 남작 작위를 승계.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증조부 : 이광엽(李光燁)
********생조부 : 이규(李圭)
*********생부 : 이호석(李鎬奭) - 아명(兒名)은 이석준(李奭俊). 감역(監役). 생부는 이질(李耋)
*********생모 : 신씨(辛氏, ?~18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