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 장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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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의 존재가 1699년부터 존재하였다면 [[숙빈 최씨]]를 비롯한 궁인 전원은 물론 [[조선 숙종|숙종]] 또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주자학을 신봉하는 조선 사회에서 무속 행위는 국법으로 엄중히 금하였지만 궁 밖은 물론 궁 안에서도 자주 치루어졌고<ref group="주">광해군 부부, 인조, 민회빈 강씨도 굿을 즐겨 하였다.</ref>,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도 [[인현왕후]]와 함께 숙종의 두창의 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였던만큼 장씨의 신당 설치 자체는 굳이 문제 삼을 사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숙빈 최씨]]는 신당의 존재에 이견을 주장하였고, [[조선 숙종|숙종]]은 [[숙빈 최씨]]가 거론한 신당의 존재를 조정 대신들에게 공식화하며 장씨가 몰래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를 시해하는 저주굿을 하였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사건 조사 당시의 편파성, 증거의 부족, 고문으로 인한 증언의 신빙성 문제 등으로 인해 희빈 장씨가 신당을 차려 굿을 한 것이 정말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세자의 쾌유를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혹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숙종실록에는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를 저주한 내용은 없다.
 
==== 최후 ====
장씨의 상례부터 장례까지의 모든 절차는 궁에서 주관하고 치루어졌으며 종친부 1품의 예로 받들어졌다.<ref group="주">숙종의 다른 후궁인 명빈 박씨와 숙빈 최씨의 상장례는 법도대로 궁 밖 사가에서 이루어졌다.</ref> 그녀의 무덤 역시 여느 후궁들<ref group="주">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의 무덤은 아들인 연잉군과 환관 장세상, 풍수에 밝은 노비 목호룡이 구하였다.</ref> 과는 달리 친정 식구나 궁속 환관이 구한 것이 아니라 왕실 종친인 금천군 이지와 예조참판 이돈이 지관들을 거느리고 여러 곳을 다니며 구하였다. 경기도 양주 인장리로 결정된 장씨의 묘는 숙종의 명으로 종친부 1품의 예<ref group="주">사방 100보의 규모로 경내에 농사와 목축을 금한다. 품계가 한 등씩 내려갈 수록 10보씩 감소된다. 문무관은 종친부와 비교해 10품씩 감하여 정1품은 90보, 6품은 40보로 한정되었으며 7품 이하는 6품과 같다. 왕실의 여인을 제외한 외명부 여성은 남편의 관직에 따른다.</ref> 로 단장되었다. 장씨의 장례 역시 여느 후궁의 장례처럼 3월장<ref group="주">세상을 떠날 달을 포함한 세 번째 달에 길일을 택하여 장례를 치르는 것. 짧게는 30일, 길게는 80여일이 장례기간이 되는데 숫자가 클 수록 상급이다. 4품 이상의 품계를 가진 이들의 장례이며 후궁, 왕자녀는 물론 왕세자 부부의 장례 또한 3월장으로 치루어진다. 1718년 3월 9일에 사망한 숙빈 최씨는 5월 12일에 장사됨으로써 정상적인 후궁의 장례인 3월장을 치렀다.</ref> 으로 치루어지지 않고 4월장으로 치루어졌는데, 왕과 왕후의 장례인 5월장보다 단지 하루가 부족한 1702년 1월 30일에 치루어졌다.<ref group="주">이 또한 후궁의 위, 왕후의 아래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왕세자의 생모인 탓에 특별 대우를 받은 것으로도 해석되기도 하지만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와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도 3월장을 치렀던 점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ref> 장례식 전날에 세자가 친림하였고, 수일 전부터 입관 당일까지 궁에서 식을 거행하였다.
 
1717년 12월, 장씨의 묘가 용맥(龍脈)은 있으나 혈(穴)이 없고 수법(水法)도 합당하지 못하여 완전한 곳이 아닌 것 같다는 함일해의 상소가 올라왔다. 1718년, 숙종은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장리 묘의 천장(=이장)을 명하였다. 예조참의가 지사로 이름난 자 10여 명을 대동하여 1년 간 기내(畿內) 길지(吉地)를 간심한 끝에 가장 평가가 우수한 광주 진해촌으로 와병 중인 숙종이 직접 택점하였다. 1719년에 치루어진 천장식 역시 궁에서 주관하였으며 숙종이 왕세자 부부에게 망곡례를 명함으로써 노론의 극렬한 반발이 있었다.<ref group="주">인장리(仁章里)에서 영구(靈柩)가 발인(發靷)하여 진해촌(眞海村) 신산(新山)으로 향하였는데, 세자가 경현당(景賢堂)에서 망곡(望哭)하고, 세자빈(世子嬪)도 궐내(厥內)에서 망곡례(望哭禮)를 거행하였다.『조선왕조실록 숙종 45년 4월 5일 기사』당시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세자(경종)가 정사를 보던 경현당에서 망곡례를 하는 것을 맹비난하던 노론은 경현당은 대리청정 업무를 보는 곳으로 곧 법전(法殿)과 차이가 없는데 세자의 사친(희빈)을 위한 예절이 지나치다고 비판</ref> <ref group="주">이러한 숙종의 처사는 숙종의 사후에도 논란이 되어 영조시대에도 경종이 숙종의 적자이며 희빈 장씨가 숙종의 제2계비로 기록한 서적이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경종이 즉위한 후 유학 조중우는 숙종의 처사가 아들인 경종이 희빈 장씨를 추존하라는 은밀한 뜻이었다고 주장하였다.『조선왕조실록 경종즉위년 7월 21일 기사』 이에 반해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은 숙종의 처사를 다시 거론하며 맹렬히 비난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영조1년 3월 25일 기사』</ref> 천장지 또한 초상 때와 마찬가지로 종친부 1품의 예장으로 단장되었으며 청룡(靑龍: 주산(主山)의 좌향(坐向)에서 본 좌측의 산맥)에 앞서 자리하고 있던 종친의 묘와 많은 민전도 모두 값을 치루어 옮기도록 하였다.
 
1720년, 그녀의 아들인 [[조선 경종|경종]]이 즉위하자 장씨를 추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이에 노론이 노골적으로 극심한 반발을 하자 [[조선 경종|경종]]은 [[조선 숙종|숙종]]이 승하한 지 한 달만에 이러한 화제를 올리는 것이 해괴하다며 상소를 올린 유학 조중우를 유배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하였지만 노론은 조중우에게 대역죄를 물어 사형에 처했다. 이 사건 직후, 성균관 장의 윤지술이 [[조선 숙종|숙종]]이 장씨를 죽인 것은 빛나는 업적이니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경종과 소론이 이에 대해 분노하여 윤지술에게 유배형을 내리고 곧 처형하려 하였지만 노론은 윤지술의 의기를 높이 사야 한다며 윤지술에게 죄를 주어선 안 된다고 방면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와 동시에 노론은 [[조선 경종|경종]]에게 왕세제 책봉을 종용하여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데 성공하였고, 그 직후 왕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해 [[조선 경종|경종]]이 정치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로 인해 [[신임사화]]가 발발하여 노론이 숙청되었다. 1721년 12월, [[조선 경종|경종]]은 비로소 1년 전에 그의 생모를 모욕한 윤지술에게 사형을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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