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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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倭寇, {{llang|ja|倭寇}}, {{llang|en|Wakou, Japanese dwarf pirates}})는 통상적으로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 [[일본 열도]] 침략에 실패한 이후인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연안부나 일부 내륙 지역을 약탈하고 밀무역을 행하던 무리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왜구는 존재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한반도]]와 [[중국]] 남부와의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대마도]], [[이키 섬]] 주민과 규슈 주민들은 [[고려]]와 [[원나라]] [[원나라의 일본 원정|침략]] ([[1274년]] 및 [[1281년]]) 이후 경제기반을 잃어 생계를 위해 해적질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왜구의 시초이다. <ref>하룻밤에 읽는 일본사 랜덤하우스코리아 {{ISBN|9788959247226}}</ref> 이후 왜구는 거대한 밀무역 세력으로 성장하여 조직화되고 거대화 되었다. 이는 배후에 밀무역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규슈]]와 [[시코쿠]] 일부 지역 영주들의 후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초기에는 [[한반도]]와 [[중국]] 남부 해안가를 따라 단순 약탈 위주로 활동하였으나 후에 노예 매매와 밀무역 등으로 큰 이익을 남기는 등 악명을 떨쳤다.
 
[[14세기]]부터 [[16세기]]에 왜구가 특히 극성을 부린 것은 당시 일본 내부적으로 [[가마쿠라 막부]](1192~1333년)가 사실상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중앙의 통제력이 지방에 미치지 못한 것을 시작으로 후에 들어선 [[무로마치 막부]](1336~1573년)는 밀무역으로 인한 이익 때문에 이를 눈감아주었고, [[쇼군]]가의 힘이 약해 지방 영주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기도 했다. [[명나라]] 시대(1368~1644년)에 남방과 주변 지역을 통제하지 못하여 왜구에 의하여 자주 점령되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왜구의 침략인 바, 이로 인해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고 국가 기반은 흔들렸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 후에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는 지방 영주들을 통제하여 왜구가 거의 근절되었다. 이 때 왜구가 감소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막부의 적극적인 왜구 근절 노력도 있었지만 동남아시아를 통해서 유입된 서양세력과의 무역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규슈 영주와 막부가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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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시대의 왜구 ===
{{본문|후기 왜구}}
건국 초기의 왜구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1393년]](태조 2) 3월부터 5월까지의 기간에 비교적 많은 사례들이 나타난다. <ref>이규철, 〈1419년 대마도 정벌의 의도와 성과〉, 《역사와 현실》(74호) 한국역사연구회, 423쪽, “왜구는 고려와의 격전을 통해 세력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조선이 건국되던 시기에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건국 초기의 왜구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태조 2년 3월부터 5월까지의 기간에 비교적 많은 사례들이 나타난다. 비록 구체적인 피해상황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고려 말에 비해 피해규모가 크게 감소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ref> 또한 같은 해 11월 [[도평의사사]]에서 왜적 피해가 줄어 든 것이 병선의 위력이라고 언급한 내용<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11028_003 4권, 태조 2년 11월 28일 기사 3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s:태조강헌대왕실록/2년#11月 28日|태조강헌대왕실록 2년 11월 28일 세 번째 기사]]〉“都評議使司以救弊事宜, 條陳上言:其一曰近來倭寇稍息, 實賴兵船之力。”(도평의사사에서 폐해를 구제하는 사의(事宜)로써 조목별로 진술하여 말씀을 올렸다. “1. 근래에 왜적(倭賊)의 침구가 조금 쉬게 된 것은 실로 병선(兵船)의 힘에 의한 것입니다. )</ref>을 살펴보면 당시 조선의 왜구 방어 대책이 효과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1394년]](태조 3)에도 왜구와 왜적에 대한 기록들이 여러 차례 나타나지만 이들에 대한 피해보다는 조선 수군이 이들을 성공적으로 요격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ref>이규철, 〈1419년 대마도 정벌의 의도와 성과〉, 《역사와 현실》(74호) 한국역사연구회, 423쪽, “태조 3년에도 왜구와 왜적에 대한 기록들이 여러 차례 나타지만 이들에 대한 피해보다는 조선 수군이 이들을 성공적으로 요격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ref> 즉, [[음력 3월 17일]], 수군 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김빈길]](金贇吉)과 만호(萬戶) [[김윤검]](金允劍)·[[김문발]](金文發) 등이 왜적의 배 3척을 잡아서 다 죽였다는 보고,<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3017_001 5권, 태조 3년 3월 17일 병진 1번째기사]</ref> [[음력 8월 15일]], 왜구(倭寇)가 충청도 [[안성]]에 침입하였는데, 수군 만호 [[장용검]](張龍劍)이 왜선 9척을 노획하였다는 내용<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8015_003 6권, 태조 3년 8월 15일 임오 3번째기사]</ref>이 그것이다. [[1396년]](태조 5) [[음력 6월 18일]] [[동래군|동래]] 만호(東萊萬戶) [[윤형]](尹衡)과 석포 천호(石浦千戶) [[이의경 (李義敬)|이의경]](李義敬)이 왜구의 배 1척을 잡아서 군기와 갑옷을 바쳤다. <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06018_001 9권, 태조 5년 6월 18일 갑진 1번째기사]</ref>[[음력 8월 9일]]에는 왜적의 배 1백 20척이 경상도에 입구(入寇)하여 병선(兵船) 16척을 탈취해 가고, 수군 만호(水軍萬戶) [[이춘수]](李春壽)를 죽였으며, [[동래성|동래]](東萊)·기장(機張)·동평성(東平城)을 함락하였다.<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08009_003 10권, 태조 5년 8월 9일 갑오 3번째기사 ]</ref> [[음력 10월 27일]] 왜구가 [[동래성]](東萊城)을 포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면서 병선 21척을 불살랐고, 수군 만호(水軍萬戶) [[윤형]](尹衡)과 [[임식]](任軾)이 전사하였다.<ref>[[#태조실록 1413|태조실록 (141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08009_003 10권, 태조 5년 10월 27일 신해 1번째기사]</ref> 1406년(태종 6년)에는 전라도에, 1408년에는 충청도에 들어와서, 혹은 운수하는 물품을 빼앗고, 혹은 병선을 불사르며 만호를 죽이기도 하였다. <ref>《[[세종실록]]》, 〈[[:s:세종장헌대왕실록/1년#6月 9日|元年(1419年) 六月 九日]]〉 </ref>
 
1419년([[세종]] 1년)에는 [[대마도 정벌|대마도를 정벌]]하고 [[3포]]를 폐쇄하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부산포, 웅천, 염호 등 삼포를 개항하여 사절(使節)과 상왜(商倭)를 왜구와 구별하여 일본인들과의 정식적인 무역을 유도하는 유화책을 쓰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