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공방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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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초기공세 ([[9월 30일]] - [[10월 10일]]) ==
=== 작전 계획 ===
히틀러에게 있어서 모스크바야말로 가장 중요한 군사적, 정치적 목표였다. 그는 모스크바가 함락되면 바로 소련 연방은 붕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독일육군 총참모장이었던 [[프란츠 할더]]는 1940년에 "가장 좋은 해법은 모스크바에 대한 직접 공세이다"라고 썼다.<ref name="MosEnc" /> 그래서 이 도시가 세 갈래의 집단군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장비가 좋은 중부집단군의 주된 목표였던 것이다. 태풍작전에 동원된 병력은 3개 기갑군(2,3,4기갑군)과 제2항공군의 지원을 받는 3개 야전군 (2,4,9군)이었다. 전체적으로 100만이 넘는 병력에 1,700대의 전차, 14,000 문의 야포, 95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ref name="GSEMoscow">Great Soviet Encyclopedia, Moscow, 1973–78, entry "Battle of Moscow 1941–42"</ref> 이 공격은 표준적인 전격전술을 사용하여 두갈래의 기갑군이 소련군의 방어진을 돌파하여 쐐기를 박고 병력을 포위하여 섬멸하도록 계획되었다 <ref>Guderian, p.307–309</ref>
 
독일군의 초기 작전계획은 두 개의 초기 기동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양갈래 돌파로 [[뱌지마]] 근방에서 소련군의 [[소련 서부 전선군|서부 전선군]]과 예비전선군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단일돌파로 [[브랸스크 전선군]]을 포위하고 [[브랸스크]] 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또 하나의 북쪽과 남쪽으로부터의 신속한 양갈래 돌파로 모스크바를 포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벌써 병참보급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구데리안은 후에 회고록에서 작전 초기부터 파괴된 전차가 보충되지 않고, 기계화부대의 연료가 부족했다고 썼다.<ref>Guderian, p. 30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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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5일, 독일 기갑군은 클린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는데, 그곳에는 스탈린의 볼론콜람스크 방면의 반격명령을 위해 병력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소련군의 예비병력이 없었다. 독일군의 초기공세는 이 전선군을 양분하여 소련군 16군과 30군을 분단시켰다.<ref name="GlantzTTG" /> 며칠간 계속된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주코프는 회고록에서, "적은 피해에도 아랑곳없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모스크바로 진격하기 위해 정면공격을 행했다."고 밝혔다.<ref name="Zhukov28">Zhukov, tome 2, p.28</ref> 독일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중방어선은 소련군의 피해를 감소시켜 16군은 천천히 후퇴했고 방위선을 돌파하려는 독일군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독일 제3기갑군은 격전끝에 11월 24일 클린, 그리고 다음날 솔네츠네고르스크를 점령하였다. 소련군의 저항은 아직 강했고, 전투의 향방은 아직 알수 없었다. 후에 알려진대로,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모스크바가 성공적으로 방위될 수 있는지 공산당원답게 솔직히 이야기하라고 물었다. 주코프는 가능하지만, 예비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대답했다.<ref name="Zhukov28" /> 11월 28일까지 독일 제7기갑사단은 최후의 주된 장애물의 하나인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건너 교두보를 확보했고 크레믈린으로부터 35&nbsp;km 근방까지 와 있었다.<ref name="GlantzTTG" /> 그러나 소련 제1돌격군의 강한 반격을 받고 운하를 건너 후퇴했다.<ref name="Zhukov30">Zhukov, tome 2, p.30</ref> 모스크바의 북서쪽 방면의 독일군은 크라스나야폴랴나(로브냐)에 도달했다.<ref>Guderian, p.345</ref> 독일군 장교들은 망원경으로 소련 수도의 주요건물을 관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 독일 양군은 모두 심하게 소모되어 어떤때는 일개 여단이 150명에서 200명의 소총수만을 보유하기도 했다. (일개 중대의 정원과 비슷했다) <ref name="GlantzTTG" />
 
툴라 근방의 남쪽에서는, 11월 18일 제2기갑군이 공세를 재개하여 시를 포위하려 시도하였다.<ref name="GlantzTTG" /> 그러나 이 공세를 맡은 독일군은 지난 전투에서 심하게 손상을 입었고 아직까지도 동계의복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독일군의 초기공세는 일일 5–10&nbsp;km 정도밖에 전진하지 못했고, 구데리안의 표현대로 성공의 기회는 불확실해져가고 있었다.<ref>Guderian, p.340</ref> 더욱이, 소련군 49군, 50군이 툴라 근방에서 독일 전차군의 측면을 공격하여 더욱더 진격 속도를 늦추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데리안은 전광석화같은 공세를 계속할 수 있었고, 11월 22일에는 스탈리노고르스키를 점령하고 소련군 일개 보병사단을 포위했다. 11월 26일 독일 전차부대는 모스크바로 통하는 고속도로가 경유하는 카쉬라에 접근했다. 이에 대응하여 소련군의 격렬한 반격이 다음날 행해졌다. 몇 개의 보병여단과 전차집단이 지원하는 벨로프 지휘의 기병군단이 독일군을 카쉬라 근처에서 정지시켰다.<ref>A.P. Belov, ''Moscow is behind us'', Moscow, Voenizdat, 1963, p.97.</ref> 독일군은 12월 초에 시의 남쪽 출구만을 확보한채 뒤로 물러섰다.<ref>Belov, p.106</ref> 툴라 자체는 방어진지에 포진한 결연한 군인과 민간인들에 의해 사수되었다. 남쪽에서는 독일군이 모스크바에 근접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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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북방과 남방의 저항때문에 12월 1일 독일군은 나로포민스크 근방에서 민스크-모스크바 고속도로를 따라 서쪽에 대한 정면공격을 행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한정된 전차 지원하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방위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소련 제1 친위자동차화보병사단의 완강한 저항과 33군의 측면공격을 받아서 독일군은 1만명의 손실과 수십대의 전차를 잃고 4일후 후퇴했다.<ref>Zhukov, tome 2, p.32</ref>
 
12월 초까지 기온은 영하 15-20도 이하로 떨어져 러시아 기준으로는 상대적으로 심한 편은 아니었다 <ref name="GlantzDecCounter">Glantz, ch.6, subchapter "December counteroffensive", p.86 and following.</ref> 그러나 동계의복이 부족한 독일군과 이런 추위에 대한 설계가 고려되지 않은 독일 차량은 얼어붙었다. 독일군은 13만명이 넘는 동상환자가 발생했다고 보고되었다.<ref name="Jukes32" /> 모든 포탄으로부터 얼어붙은 윤활액을 제거해야만 했고,<ref name="Jukes32" /> 차량은 가동전에 한시간동안 예열시켜야 했다. 추축국의 모스크바 공략은 정지되었다. 구데리안은 일기에 "모스크바에 대한 공략은 실패했다... 우리는 병력과 기후뿐만 아니라 적의 역량을 과소평가했다. 운좋게도 나는 12월 5일 우리 부대를 정지시켰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파국은 피할 수 없었을것이다."라고 썼다.<ref>Guderian, p.354–355</ref>
 
== 소련군의 반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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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방 손실 ==
모스크바 공방전중의 독일군과 소련군의 손실은 각기 여러자료들의 다른 추정치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리고 모든 역사가들이 모스크바 공방전의 기간 설정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대체로 전투의 시작을 1941년 9월 30일(때때로 10월 2일)의 태풍작전 개시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반면, 공방전의 종료일에 대해서 두가지 다른 설이 있다. 특히 에릭슨같은 사람 <ref name="Erickson">John Erickson, ''Barbarossa: The Axis and the Allies'', table 12.4</ref> 과 글란츠는 <ref name="GlantzB">Glantz, Table B</ref> 는 르제프 공세를 이 전투의 범위에서 빼서, 1942년 1월 7일을 종료일로 잡아 사상자 수를 적게 계산하였다. 르제프와 뱌지마 작전을 작전의 범위에 넣은 역사가들은 좀 더 사상자수를 높게 추산한다.<ref name="MosEnc" /><ref name="GSEMoscow" /> 르제프 작전이 1942년 1월 8일 시작되어 이전의 전투들로부터 휴지기 없이 전투가 계속되었으므로 이런 태도는 이해될 만하다.
 
여러 자료에 따른 사상자의 수치도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에릭슨은 그의 책 "바르바로사(Barbarossa: The Axis and the Allies)"에서 1941년 10월과 1942년 1월 사이에 소련군은 653,924 명의 인명손실을 냈다고 밝혔다.<ref name="Erickson" /> 글란츠는 그의 책 "거인들의 대결"에서, 방위 국면에서만 658,279 명의 손실을 냈고 1월 7일의 동계반격에서 370,955 명의 손실을 더 냈다고 서술했다.<ref name="GlantzB" /> 1973-1978년에 출판된 소련대백과사전에서는 1942년 1월까지 400,000명의 독일군 손실을 기록했다.<ref name="GSEMoscow" /> 또다른 추정으로는 1997년에 출판된 "모스크바 백과사전"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방위국면에서 145,000명의 독일군과 900,000명의 소련군 손실을, 그리고 1월 7일까지의 반격에서 103,000명의 독일군과 380,000명의 소련군 손실을 기록했다.<ref name="MosEnc" /> 그러므로 1941년 9월 30일부터 1942년 1월 7일까지의 총손실은 독일군 248,000 명에서 400,000명 (GSE / Moscow encyclopedia estimate) 소련군 650,000명에서 1,280,000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Erickson / Moscow encyclopedia estim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