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잭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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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 ===
잭슨 정부의 2기(期) 동안 외교에 있어서는 대체로 평온하였다.<ref>John M. Belohlavek, ''Let the Eagle Soar!: The Foreign Policy of Andrew Jackson'' (1985)</ref><ref>John M. Belohlavek, "'Let the Eagle Soar!': Democratic Constraints on the Foreign Policy of Andrew Jackson." ''Presidential Studies Quarterly'' 10#1 (1980) pp: 36-50 [http://www.jstor.org/stable/27547532 in JSTOR]</ref> 가장 심각한 위기는 프랑스와 있었는데, 잭슨이 임기를 개시한 1829년, 나폴레옹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 선박들의 나포에 따른 약탈에 보상 요구가 미국과 프랑스 정부 간의 긴장 관계를 야기하였다.{{sfn|Latner 2002|pages=119–20}} 20여년전, 나폴레옹 치세의 프랑스 해군이 미국 선박들을 나포하고 어떤 보상이나 사법적 절차도 없이 강제 노역을 시키고서는 스페인의 항구로 그 배들을 끌고 갔었다. 국무장관 [[마틴 밴 뷰런]]에 따르면, 미국과 프랑스 간의 관계는 "희망이 없었다." {{sfn|Latner 2002|pages=119–20}} 그런데 이를 잭슨 정부의 주(駐)프랑스 공사 [[:en:William Cabell Rives|윌리엄 캐벨 리브스]]가 외교를 통하여, 배상금으로 2500만 프랑(500만달러)를 지급하는 배상금 조약에 프랑스가 서명(1831년 7월 4일)하도록 하였다. <ref name=Cunningham_1999>{{웹 인용|last=Cunningham |first=Hugo S. |title= Gold and Silver Standards France |date=1999 |url=http://www.cyberussr.com/hcunn/gold-std.html#france |accessdate=2016-01-05}}</ref>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내부의 재정 결핍과 정치적 어려움으로 납부를 연체하였다. 프랑스의 [[루이 필리프 1세]]와 그의 내각은 [[:fr:Chambre des députés (Troisième République)|프랑스 대의원(代議院)]]을 비난하였다. {{sfn|Latner 2002|pages=119–20}} 1834년까지도 프랑스 정부가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자, 잭슨은 분노하였고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1834년 12월 1일자, [[:s:en:Andrew Jackson's Sixth State of the Union Address|메시지를 통한 제6차 국정 연설]]에서 프랑스 정부의 납입 연체를 단호하게 질책하고, 미연방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단단히 실망했다는 점을 표명하고, 프랑스에 대한 무역 보복을 승인해 줄 것을 의회에 요청하였다.{{sfn|Latner 2002|pages=119–20}} 이와 같이 잭슨은 전쟁이라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취하였고, [[휘그당(미국)|휘그당]]은 그의 호전성을 비웃었다.
 
잭슨의 성명에 모욕감을 느낀 프랑스인들은 사과를 요구하였다. 1835년 12월 7일자, [[:s:en:Andrew Jackson's Seventh State of the Union Address|메시지를 통한 제7차 국정 연설]]에서 잭슨은 사과하기를 거절하면서, 그는 프랑스인들에 대해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의도는 평화적인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그는 조약의 배경이 되는 역사에 대해서 길고도 자세하게 설명하였고, 또한 프랑스 정부가 의도적으로 지급을 지연하는 것이라는 그의 신념도 설명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잭슨의 교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1836년 2월에 마침내 보상금을 지급하였다.{{sfn|Latner 2002|pages=119–20}} <ref>Robert Charles Thomas, "Andrew Jackson Versus France American Policy toward France, 1834-36." ''Tennessee Historical Quarterly'' (1976): 51-64 [http://www.jstor.org/stable/42623553 in JSTOR]</ref><ref>Richard Aubrey McLemore, "The French Spoliation Claims, 1816-1836: A Study in Jacksonian Diplomacy," ''Tennessee Historical Magazine'' (1932): 234-254 [http://www.jstor.org/stable/42637629 in JSTOR].</ref>프랑스 뿐만 아니라, 잭슨 정부는 [[덴마크]], [[포르투갈]], [[스페인]]과의, 약탈에 따른 보상금 청구도 성공적으로 합의하였다.{{sfn|Latner 2002|page=120}}
 
큰 성과는 또 있었다. 전임자 [[존 퀸시 애덤스]]가 실패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잭슨 정부는 영국과의 무역 조약을 성공적으로 협상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총리가 교체되었고, 또 영국의 무역 정책이 자유무역주의로 나아간 것에도 성공요인이 있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의 상선들이 서인도 식민지들에서의 무역을 재개하였다.{{sfn|Latner 2002|page=120}} 또한, 잭슨 정부의 [[미국 국무부|국무부]]는 활발히 움직여서 [[니콜라이 1세|러시아 제국]] · [[스페인]] · [[마흐무트 2세|오스만 제국]] · [[라마 3세|라따나꼬신 왕국]](1833년)과의 무역 조약의 체결도 완수하였다. 라따나꼬신 왕국과의 무역 조약은 미국이 아시아 국가들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수출은 75%, 수입은 250% 증가하였다. {{sfn|Latner 2002|page=120}} 1832년부터 1834년까지 [[응우옌 왕조]] · 라따나꼬신 왕국 · 머스캣에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미국으로 돌아간 특사 [[에드먼드 로버츠]]는 국무장관 [[:en:Louis McLane|루이스 맥레인]]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 보고서에서 그는 "조선 및 북부 중국과 통상을 여는 길은 먼저 일본과 조약을 맺는 것"이라고 하였으나, 몇 년 후 그가 병사하는 바람에 일본과의 교섭은 성사되지 못하였다.<ref>{{서적 인용|제목=The Korean struggle for International identity in the foreground of the Shufeldt Negotiation : 1866 - 1882 |url= https://books.google.co.kr/books?id=hRAPN6SZqKUC |저자=Woong Joe Kang |isbn=9780761831204 |쪽=79~80}}</ref> 이로서 잭슨 정부는 [[도광제|청나라]] · [[에도 막부]]와의 무역을 개시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sfn|Latner 2002|page=120}} 그리고 잭슨 정부는 남아메리카에서의 영국의 존재와 힘을 꺾지 못했다. 또한 [[멕시코]]로부터 [[텍사스]]를 500만 달러에 매입하려던 시도도 실패하였다.{{sfn|Latner 2002|page=120}} 주(駐)멕시코 [[임시대리대사]] [[:en:Anthony Butler (diplomat)|앤소니 버틀러]]는 텍사스를 무력으로 점령하자고 제안했지만, 잭슨은 이를 거절하였다. 버틀러는 잭슨의 집권 말기에 교체되었다.{{sfn|Latner 2002|page=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