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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 [[백제의 역대 국왕|백제의 제26대 국왕]]
}}
'''성왕'''(聖王, ? ~ [[554년]], <small>재위:</small> [[523년]]~[[554년]] [[음력 12월]])은 [[백제]]의 제26대 [[군주|국왕]]이며, 성은 부여(扶餘), [[피휘|이름]]은 명농(明禯)이고, [[삼국유사]]에는 명농(明穠), 중국 측 기록인 [[양서]](梁書)에는 이름이 명(明)으로 기록되었다.<ref>[http://issue.media.daum.net/culture/history/view.html?issueid=2611&newsid=20070502094412232&cp=segye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봇이 붙인 제목 -->]</ref> [[무령왕]]의 아들로 결단성이 있고 지혜와 식견이 빼어났다. 무령왕이 죽자 왕위를 이은 명농을 백성들은 '''성명왕'''이라 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聖王 諱明禯 武寧王之子也 智識英邁 能斷事 武寧薨 繼位 國人稱爲聖王 (성왕(聖王)은 이름이 명농(明禯)이고 무령왕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빼어나고 일을 잘 결단하였다. 무령이 죽자 왕위를 이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일컬어 성왕이라 하였다. )-->}}</ref> 《[[일본서기]]》에는 성명왕(聖明王) 또는 명왕(明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왕은 생존 시에도 성명왕 혹은 성왕이라는 존호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성왕'은 '전륜성왕'을 줄인 이름으로, 성왕은 불가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여 왕실과 국왕의 권위를 높이는데 사상적으로 [[불교]]를 적극 활용한 것으로 여겨진다.<ref>{{서적 인용 |제목= 고대로부터의 통신 | 저자=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연도= 2004 |출판사=푸른역사 |쪽=256 |id={{ISBN|8987787796}} |인용문= <!--이 기록에서 백제 성왕聖王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성왕으로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성왕은 전륜성왕을 줄인 말이다. 나라 사람들이 왕을 성왕으로 부른 것은, 왕 자신이 전륜성왕을 자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성왕이 사상적으로 불교를 왕실과 국왕의 권위를 수식하는 데 적극 활용하였다는 의미다.--> }}</ref> 성왕은 왜(倭)에 불상과 불경을 전해주었고<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十九|卷第十九 欽明天皇]] |인용문=<!--十三年...冬十月、百濟聖明王、更名聖王。遣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等、獻釋迦佛金銅像一軀・幡蓋若干・經論若干卷。 (13년(552년) 겨울 10월, 백제의 성명왕(혹은 성왕이라고도 한다)이, 서부 달솔 희씨 노리사치계를 보내어 석가불금동상 1구와 깃발 약간, 경전 여러 권을 보냈다.--> }}</ref>, 또 [[겸익]]이 [[인도]]에서 [[불경]] 등을 가지고 돌아오자 이를 크게 환영하는 한편, 그 불경을 번역하게 하는 등 <ref>{{서적 인용 |제목=[[:s:미륵불광사 사적|미륵불광사 사적(彌勒佛光寺事蹟)]]|인용문=<!--聖王四年丙午 沙門謙益 ... 與梵僧倍達多三藏 齎梵本 阿毘曇藏 五部律文 歸國 百濟王以羽葆鼓吹 郊迎 安于興輪寺 召國內名釋二十八人 與謙益法師 譯律部七十二卷 . (백제 성왕(聖王: 재위 523~554) 4년인 526년(병오년)에 승려 겸익(謙益)이 ... 인도의 승려인 배달다 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산스크리트어 《아비담장(阿毘曇藏)》과 《오부율(五部律)》 문헌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백제에 도착했을 때, 새 깃으로 만든 의장(羽葆)를 갖추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 환영 행사와 함께, 백제 성왕(百濟王)이 직접 성문 밖에 나와서 겸익법사(謙益法師)와 배달다 삼장(倍達多三藏)을 맞이하였다. 성왕은 이들을 흥륜사(興輪寺)에 거주하게 하였고 국내의 이름난 승려(名釋) 28인을 불러 겸익법사와 함께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하게 하였다. )-->}}</ref> [[불교]] 번성과 교단 정비에 노력하였다. 또한,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을 초빙하여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을 제작하게 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고대로부터의 통신 | 저자=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 분과 |연도= 2004 |출판사=푸른역사 |쪽=264|id={{ISBN|8987787796}} |인용문= <!--... 불교를 번성케 하고 교단을 정비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공장과 화사 등을 초빙한 것은 사찰과 장엄한 불상을 세우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ref>
 
== 생애 ==
[[523년]] [[음력 5월]]에 부왕인 [[무령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그해 [[음력 8월]] [[패수]](浿水)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知忠)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秋八月 高句麗兵至浿水 王命左將志忠 帥步騎一萬 出戰退之 (가을 8월에 고구려 군사가 패수(浿水)에 이르렀다. 왕은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步騎] 1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싸우게 하여 이를 물리쳤다. )-->}}</ref> 한편,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이 즉위한 때는 무녕왕이 서거한 이듬해인 524년 정월로 기록되어 있다. [[524년]] [[양 (남조)|양(梁)나라]] [[양 무제|고조(高祖)]]와 국교를 강화하여 양 고조로부터 "지절도독 백제제군사수동장군 백제왕(持節都督 百濟諸軍事 綏東將軍 百濟王)"에 책봉되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二年 梁高祖詔 冊王爲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 (2년(524) 양(梁)나라 고조(高祖)가 조서를 내려 왕을 책봉하여 지절(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수동장군(綏東將軍)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ref> [[525년]] 음력 2월, [[신라]]와 사신을 교환하여 수교하는 한편,<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三年 春二月 與新羅交聘 (3년(525) 봄 2월에 신라와 서로 사신을 교환하였다[交聘]. )-->}}</ref> [[526년]] [[음력 10월]] [[웅진성]]을 수리하였으며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四年 冬十月 修葺熊津城 立沙井柵 (4년(526) 겨울 10월에 웅진성(熊津城)을 수리·수선하고 사정책(沙井柵)을 세웠다. )-->}}</ref> 남조와 연대하고, 왜와 제휴를 꾀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는 전통적 외교 노선을 다져나갔다.
 
[[529년]] [[음력 10월]], [[고구려 안장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혈성이 함락되었다. 성왕은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3만을 이끌고 싸우게 했지만 [[오곡원]](五谷原) 전투에서 패하여 2천여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전사하는 등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七年 冬十月 高句麗王興安 躬帥兵馬來侵 拔北鄙穴城 命佐平燕謨 領步騎三萬 拒戰於五谷之原 不克 死者二千餘人 (7년(529) 겨울 10월에 고구려 왕 흥안(興安)[안장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하였다. [왕은]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步騎]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의 벌판에서 막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ref>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이후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처하였으며, 534년 3월에 사신을 보내 양(梁)나라에 조공하였다.
그 해 여름 4월 정묘에 형혹(熒惑; 화성)이 남두(南斗, 남두육성 ; 궁수자리의 일부)를 침범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十二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夏四月丁卯 熒惑犯南斗 (12년(534) 봄 3월에 사신을 양(梁)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정묘에 형혹(熒惑)이 남두(南斗)를 침범하였다. )-->}}</ref>
 
[[538년]] [[봄]],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 (지명)|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부여|남부여]]라 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十六年 春 移都於泗沘 一名所夫里 國號南扶餘 (16년(538년) 봄에 서울[都]을 사비(泗沘)<다른 이름은 소부리(所夫里)였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ref> 540년 9월에 왕은 장군 연회(燕會)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十八年 秋九月 王命將軍燕會 攻高句麗牛山城 不克 (18년(540) 가을 9월에 왕은 장군 연회(燕會)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ref> (541년)에 왕이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표를 올려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 경서) 및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을 청하여 양나라의 허락을 받았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十九年 王遣使入梁朝貢 兼表請毛詩博士·涅槃等經義幷工匠·畵師等 從之 (19년(541년)에 왕이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표를 올려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 및 공장(工匠)과 화사(畵師) 등을 청하였더니 [양나라에서] 이를 허락하였다. )-->}}</ref> 548년 정월에 고구려 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한북, 漢北)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오자 성왕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진흥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 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3] 領甲卒三千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26년(548) 봄 정월에 고구려 왕 평성(平成)[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한강 북쪽[漢北]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군을 크게 무찔렀다. )-->}}</ref> 549년 10월에 성왕은 양나라의 건강(建康)에 후경(侯景, ? ~ 552년, 양의 장군)의 난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이르러 이미 황폐하고 허물어진 성(城)과 대궐을 보고 단문(端門) 밖에서 소리 내 우니, 길을 가던 사람들이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은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사신 일행을 모두 잡아 가두어 버렸다. 그 후 후경의 난이 평정되고 그들은 비로소 환국할 수 있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二十七年 ... 冬十月 王不知梁京師有寇賊 遣使朝貢 使人旣至 見城闕荒毁 竝號泣於端門外 行路見者 莫不灑淚 侯景聞之大怒 執囚之 及景平 方得還國 (27년(549) 봄 정월 경신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은 양나라의 서울[京師]에 반란[寇賊]이 있었음을 알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이르러 성(城)과 대궐이 이미 황폐하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모두 단문(端門) 밖에서 소리내어 우니, 길을 가다가 보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후경(侯景)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잡아 가두었는데, 후경의 난이 평정되어서야 바야흐로 환국할 수 있었다. )-->}}</ref> [[불교]]를 진흥했으며 [[중국]]의 [[남북조 시대|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여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다. 550년 정월에 왕은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3월에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二十八年 春正月 王遣將軍達已 領兵一萬 攻取高句麗道薩城 三月 高句麗兵圍金峴城 (28년(550) 봄 정월, 장군 [[달기]](達己)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고구려 도살성(道薩城)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같은 해 3월 고구려 군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 공격하였다. )-->}}</ref>[[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나제 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 . <ref>{{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신라의 발전#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551년(진흥왕)에는 백제와 더불어 북진하여 한강 상류 지역을 점령하였다.--> }}</ref>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신라 진흥왕은 함경남도, 함경북도까지 진출하여 순수비를 세우며 세를 넓혀갔지만, 고구려는 돌궐과의 전쟁으로 신라의 영토 확장에 대응할 수가 없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게 고구려 평양성 협공을 제의하였고, 고구려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 등 진흥왕이 새로 개척한 땅을 신라 땅으로 용인해 주는 대신, 수도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 것을 제의하였다. 진흥왕은 백제의 제의를 거절하고 고구려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신라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로 영토를 확장하고 백제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제가 화해를 원하므로 진군을 멈추었다. [[553년]] [[음력 7월]],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회복한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신라]]에 빼앗기고,<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31년(553) 가을 7월에 신라가 동북쪽의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ref><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진흥왕|본기 권4 진흥왕]] |인용문= <!--十四年 ...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湌武力爲軍主 (14년(553년) ... 가을 7월에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ref> 신라에 포위되었다. <ref>{{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고대사회의 발전/삼국의 성립과 발전/신라의 발전#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신라의 건국과 발전〔槪說〕]]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553년에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여 백제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 }}</ref> 음력 10월에 왕녀를 [[신라]]의 [[진흥왕]]에게 시집보냈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三十一年 ... 冬十月 王女歸于新羅 (31년(553년)... 그 해 겨울 성왕의 장녀, 소비공주가 진흥왕의 후궁으로 신라에 보내졌다. )-->}}</ref>
 
[[554년]] [[일본]]에서 병사를 모으는 한편, [[위덕왕|왕자 창]](昌):27대 [[위덕왕]](威德王)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다. 하지만 [[신라]]의 고간 도도에게 살해당하였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성왕의 사망년도는 [[554년]]이다.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고 신라와 전쟁을 벌이다 전사한 것은 현존하는 기록들 모두가 증언하고 있지만,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기록이 모두 다른 의견을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기(백제)에서는 "32년(554년)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여 친히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 현재의 [[옥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伏兵)이 일어나자 더불어 싸웠으나 난병(亂兵)에게 해침을 당하여 죽었다."고 하고<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6/성왕|본기 권26 성왕]] |인용문=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ref> 본기(신라)에서는 "백제왕 명농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軍主)였던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이 주병(主兵)을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우도도]](高于都刀)가 백제왕을 급히 쳐서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네 명과 군사 2만 9천6백 명의 목을 베었고 단 한 마리의 말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진흥왕|본기 권4 진흥왕]] |인용문=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禯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ref> 고 기록되어 있다. 즉, 성왕이 한강을 빼앗긴 것을 분하게 여겨 성왕이 밤에 몰래 신라를 기습하려다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왕이 데리고 갔던 군사가 불과 50명에 불과했다는 기록을 볼 때 내용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ref>이희진, 《전쟁의 발견》</ref> 태자 창이 직접 참여한 [[관산성 전투]]는 오히려 성공적으로 완수되었으며, 성왕은 전후 수습을 위해 측근들을 데리고 관산성으로 가다가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반면에 [[일본서기]]에 보면 [[음력 12월]] 아들인 창이 신라로 쳐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를 쌓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전장에서 침식도 잊고 지내던 아들을 안쓰럽게 여긴 성왕은 이를 위로하러 관산성으로 향했다. 한편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미리 입수한 신라군은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성왕에 대한 기습을 감행했고, 불과 50명밖에 데리고 있지 않았던 성왕은 신라의 고도(苦都)가 이끄는 군사에 사로잡혔다. 고도는 성왕에게 "왕의 목을 베게 해주시오."라고 청하고, 성왕은 "왕의 목을 천한 종의 손에 넘길 수 없다"며 거절했으나 고도는 "우리 국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긴 자는 왕이라 해도 종의 손에 죽소."라며 잘라 말했다. 이에 성왕은 "과인은 지금껏 뼈에 사무치는 고통을 안고 살아왔지만,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하며 죽음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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