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필리프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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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름 = {{lang|fr|Louis-Philippe I}}
|그림 = 1841 portrait painting of Louis Philippe I (King of the French) by Winterhalter.jpg
|그림설명 =''루이 필리프 1세의 초상화, [[프란츠 빈터할터]] 작, 1841년''
|서명 = Signature of Louis Philippe I.png
|서명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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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2년 루이 필리프의 딸, [[:en:Marie-Louise of France|루이즈]]가 [[벨기에의 레오폴 1세|레오폴 1세]]와 결혼함으로써 [[벨기에]]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다. 1832년 5월, [[윌리엄 4세|영국]], [[니콜라이 1세|러시아]] 그리고 프랑스라는 세 열강국 간의 회의가 영국 런던에서 열렸다. 이 [[런던 회의 (1832년)|런던 회의]]는 [[그리스]]에 안정적인 정부를 성립하기 위해 모인 국제 회의였다. 이 협상으로 바이에른 왕자 [[오톤 (그리스)|오톤]]을 임금으로 세워 [[그리스 왕국]]이 성립하였다. 같은 해 6월 5일부터 6일까지, [[7월 왕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공화주의자들이 국왕의 유력한 조력자이자 추밀원 의장인 [[카지미르 피에르 페리에]]가 [[5월 16일]]에 사망하고, 뒤이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휘하의 장군이자 자유주의 정치가인 [[장 막시밀리앙 라마르크]]가 [[6월 1일]]에 사망한 것을 계기로 봉기([[6월 봉기]])를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1829년 임기를 개시하였는데, 미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나폴레옹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미국 선박들의 나포에 따른 약탈에 보상 요구가 긴장 관계를 야기하였다.{{sfn|Latner 2002|pages=119–20}} 프랑스 해군이 미국 선박들을 나포하고 어떤 보상이나 사법적 절차도 없이 강제 노역을 시키고서는 스페인의 항구로 그 배들을 끌고 갔었다. 미국의 국무장관 [[마틴 밴 뷰런]]에 따르면, 미국과 프랑스 간의 관계는 "희망이 없었다." {{sfn|Latner 2002|pages=119–20}} 그러나, 잭슨 정부의 주(駐)프랑스 공사 [[:en:William Cabell Rives|윌리엄 캐벨 리브스]]는 외교를 통하여, 배상금으로 2500만 프랑(500만달러)를 지급하는 배상금 조약에 프랑스가 서명(1831년 7월 4일)하도록 하였다.
* 1838년 루이 필리프는 멕시코 [[:en:Pastry War|제과전쟁]]을 위하여 군대를 파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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