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독립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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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합스부르크 왕가의 과중한 세금 ===
[[플란데런]] 지방은 오랫동안 프랑스 국왕의 지배하에 있는 풍요로운 지방이었다. 또한 네덜란드의 다른 지방들 역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하에서 기업이 성장하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ref>Jansen, H. P. H. (2002). Geschiedenis van de Middeleeuwen (in Dutch), 12th (1st - 1978), Het Spectrum. {{ISBN|90-274-5377-2}}. </ref> 카를 5세의 통치 영역은 유럽과 아메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고 특히 유럽의 영토는 유럽 대륙의 중요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이로 인해 카를 5세의 유럽 영토는 주변 전쟁에 언제나 휘말려 들었고 영토의 통치와 방어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 대립하게 되었고, [[오스만 제국]]과 [[지중해]]를 놓고 대결하게 되었으며, 후에는 [[독일]] 지역의 [[개신교]]와도 전쟁을 벌여야 했다. 카를 5세는 네덜란드에서 무거운 세금을 거둬 이러한 전쟁의 비용을 충당하였다.<ref>Israel, J. I. (1998). The Dutch Republic Its Rise, Greatness, and Fall 1477-1806, 1st paperback (1st - 1995), Oxford University Press, 132-134. {{ISBN|0-19-820734-4}}. </ref> 그러나 네덜란드에 대한 이러한 정책은 결국 네덜란드 역시 카를 5세에 대항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개신교의 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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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괴젠}}
[[파일:Detail_of_a_portrait_of_Fernando_Alvarez_de_Toledo_by_Antonio_Moro.jpeg|섬네일|'''알바 공'''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
[[1565년]] 네덜란드는 [[북방 7년 전쟁]]의 여파와 흉년이 겹쳐 경제가 침체되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네덜란드에는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신자들을 중심으로 [[반란]]의 기운이 가득차게 되었다. [[1566년]] 8월 [[플랜더스]]의 혼트슈테 교회를 습격한 칼뱅주의자들은 교회에 있던 [[가톨릭 성인]]의 [[성상 파괴|성상을 파괴]]하였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성상 파괴 운동 중의 하나였다. [[성서]]주의자들인 [[칼뱅주의자]]들은 성상이 [[십계명]]에서 금지한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성상파괴를 정당화 하였다. <ref>Van der Horst, Han (2000). Nederland, de vaderlandse geschiedenis van de prehistorie tot nu (in Dutch), 3rd, Bert Bakker, 133. {{ISBN|90-351-2722-6}}. </ref> 성상 파괴에 참여한 인원은 적었으며<ref>Limm (1989)은 당시 북부지방에서는 성상파괴에 가담한 인원이 2백여명 이하이며, 남부지방에서는 보다 대규모 군중이 성상파괴를 위해 무리지어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p. 25).</ref> 그들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지방 정부는 그들의 파괴행위를 방관하였다.<ref>See Spaans (1999)는 당시 성상파괴 가담자들이 지역에서 정치력을 행사하는 [[엘리트]]들이였으며 이들은 정치적 이유로 성상을 파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52 ff. (Spaans, J. "가톨릭과 북부 네덜란드의 저항운동". 《1555년 - 1585년, 프랑스 및 네덜란드의 내전, 개혁, 반란 등》,Benedict, (Amsterdam 1999), 149-163). </ref>
 
이러한 성상 파괴 운동의 발생은 네덜란드 귀족을 두 편으로 갈라놓았다. 오란네공과 브레데로드 백작 헨리가 각 진영의 정점에 있었다. 귀족들의 청원에 응답하기 전부터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펠리페 2세는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것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1567년]] [[8월 22일]], [[알바공, 페만도 알바레즈 톨레도]]가 1만의 군대를 이끌고 브뤼셀에 주둔하였다.<ref>Van der Horst, Han (2000). Nederland, de vaderlandse geschiedenis van de prehistorie tot nu (in Dutch), 3rd, Bert Bakker. {{ISBN|90-351-2722-6}}pages=134.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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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는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라는 전혀 다른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1570년]] 알바공은 여전히 반란군에 대해 우위에 있었으나 그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재정은 고갈되고 있었다. 알바공은 네덜란드에 주둔하고 있는 에스파냐 군대의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네덜란드 의회에 새로운 [[세법]]을 공포하도록 요청하였다. 이른바 "1할세"로 불린 이 세금은 모든 판매수익과 토지수익의 1할을 [[세금]]으로 납부하도록 한 것이었다. 네덜란드 의회는 새로운 세법의 공포를 거절하였고 일정 정도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571년]]에 이르러 알바공은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할세를 강행하였다.<ref>Limm (1989)</ref> 이러한 알바 공의 압제는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이냐, [[개신교]] 신자이냐 하는 교파의 구분없이 모든 네덜란드 주민들이 불만을 품도록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반란은 더욱 거세지고 많은 주민들이 강제로 부과된 세금을 피해 알바공의 통치 지역에서 도망치게 되었다.
 
[[1572년]] [[3월 1일]]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에스파냐 국왕의 요청이라는 명분으로 [[영국]]의 항구에서 "바다의 거지들"이라 불리던 [[괴젠]]을 추방하여 이들을 네덜란드로 보냈다. [[4월 1일]]이 되자 괴젠들은 [[루멘]]의 영주 [[라마르크의 빌렘 2세]]를 지도자로 하여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브리엘]]을 점령하였다. 브리엘의 점령후 반군은 점차 북 네덜란드의 여러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모든 저지대의 개신교들의 반군 결성을 이끌어 내었다. <ref>Henry (2005)</ref>
 
[[1572년]] [[도르드레히트]]에서 빌렘 1세는 [[홀란트]], [[제일란트 주|젤란트]], [[위트레흐트 주|위트레흐트]], [[프리스란트]]의 통치자이자 장군으로서 반군들과 회동하였다. 이 회동에서 오라네 왕가와 국가의 권력 분립이 합의되었다. [[1578년]] 여전히 로마 가톨릭 교회 세력이 우세하였던 [[암스테르담]]과 [[미델부르크]]를 제외한 홀란트와 젤란트 대부분의 도시가 반군에 가담하였다. 이로써 북 네덜란드 내에서 반군의 영향력은 급속히 확대되었고 두 번째 결정적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ref>Limm 1989, p. 40 </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