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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실복신'''(鬼室福信, 원래 이름은 '''[[부여복신]]'''(扶餘福信), ? ~ [[663년]])은 [[백제]]의 왕족·무장·관리이다. [[660년]] [[신라|나]](羅) · [[당나라|당]](唐) [[연합군]]의 침입으로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義慈王)이 당에 끌려가자, 승려 [[도침]]과 함께 거병하여 [[흑치상지]](黑齒常之), [[지수신]](遲受信) 등과 [[임존성]](任存城)에서 항전했다. 이후 [[주류성]](周留城)으로 근거를 옮겼으며, [[일본|왜국]]에 볼모로 가있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옹립하고 [[고구려]]와 왜국에 원병을 청해 백제 부흥을 꾀했다.
 
같은 부흥군 지도자였던 승려 [[도침]]과의 권력 분쟁으로 결국 [[663년]] 도침을 살해하고, 전권을 잡은 데에 이어 부여풍마저 살해하려다 도리어 부여풍에게 살해당했다. 그가 죽은 뒤 부흥군은 급속히 몰락했다.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에서 열리는 [[은산별신제]]의 장군신으로 존숭된다.
 
== 생애 ==
=== 출생 및 성장 ===
[[백제 무왕|무왕(武王)]]의 조카이며 [[백제 법왕|법왕(法王)]]의 서손자(庶孫子)라고는 전하나 복신의 계보에 대한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의 가계에 대해 《[[구당서]](舊唐書)》 및 《[[자치통감]](資治通鑑)》등의 [[중국]] 사서를 인용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그를 [[백제 무왕|무왕]](武王)의 조카라고 기록했다. 기록에는 '질(姪)' 혹은 '종자(從子)'로 적었다. 이 경우 [[무왕 (백제)|무왕]]의 아들인 [[의자왕]]에게는 그가 종제(從弟)이며 [[부여풍]]에게는 숙부(당숙)가 된다. 일본의 역사책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그의 이름을 귀실복신(鬼室福信)이라고 적고 있는데, 《[[신찬성씨록]]》에는 귀실이라는 성씨에 대해 원래 [[부여씨]](扶餘氏)였으나 '귀신의 감화'를 받아 성을 귀실(鬼室)로 고쳤다<ref>《신찬성씨록》좌경제번(左京諸蕃)·하(下), 구다라노기미(百濟公)조 "百濟公, 因鬼神感化之義, 命氏爲鬼室."</ref>고 설명하고 있는 것에서, 원래 왕족이었던 복신의 가계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귀실씨 사성을 통해 부여씨에서 갈라져나와 분지화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구당서》 백제전으로, 무왕 28년([[627년]]) 가을 8월에 무왕의 사절로 당에 파견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7/무왕|백제본기 27 무왕]] |인용문=二十八年... 秋八月 遣王姪福信 (28년(627) ...가을 8월에 왕의 조카 복신(福信)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ref>되었을 때 관위는 2위 [[달솔]](達率)이었다. 이때 [[당 태종]]은 복신과 함께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을 불러다 놓고 백제와 고구려에 신라를 공격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조서를 내렸지만 백제는 바로 이듬해인 무왕 29년([[628년]]) 봄 [[2월]]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했다.
 
{{출처 필요|날짜=2018-02-03|내용=귀실씨의 유래, 기사 자체의 신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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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를 즈음해 복신은 유인궤에게 사신을 보내 “대당(大唐)이 신라와 서약하여, 백제인은 노소(老少) 가리지 않고 다 죽인 다음 우리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했다는데, 가만히 앉아 죽음을 받음은 싸우다 죽느니만 못하기에, 모여서 스스로 굳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구당서》 백제전)라는 취지를 전하게 했다. 유인궤는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사절을 시켜 답서를 보냈지만, 그 사절의 터무니없이 낮은 관등을 트집잡은 도침측에 의해 접견도 못 해보고 협상은 무산되었다. 복신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은 웅진강(熊津江) 어구에 두 개의 목책을 세우고 맞섰지만, 거꾸로 나·당 연합군의 반격을 받고 목책 안으로 퇴각하는 와중에 익사자 및 전사자 1만여 명을 내고, 사비성의 포위를 풀고 임존성으로 퇴각했다. 신라군도 군량이 떨어져 철군했다.(《삼국사기》) 이후 당나라군은 부흥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는 대신 신라군으로 하여금 당나라군 대신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게 하는 전술로 전환했다.(『문무왕보서』)<br />
 
복신은 신라가 파병한 지원군이 부흥군 지도부가 있던 주류성으로 오던 도중인 3월 5일, 두량윤성(豆良尹城) 남쪽에 신라군이 군영을 짓느라 대열이 정비되지 않은 틈을 노려 불시에 기습했다. 신라 군사는 군영을 짓다 말고 놀라 흩어져 달아났다. 12일에 고사비성(古沙比城) 바깥에 주둔하면서 신라군은 두량윤성을 공격했으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고 4월 19일에 군사를 돌이켰다. 복신은 남은 신라 병사의 숫자가 적다는 것을 알고 퇴각하는 신라군의 후방을 빈골양(賓骨壤)에서 엄습했고, 여기서 신라군이 지니고 있던 많은 무기와 식량, 말과 수레 등 각종 보급품을 획득했다. 이후 신라는 감히 다시 출병하지 못했다.(《구당서》) 이에 남쪽의 여러 백제 성들이 일시에 모두 복신에게 가담하기에 이르렀으며, 여세를 몰아 복신은 다시 사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에 대한 포위전과 게릴라전을 재개했다. 복신에게 포위되어 보급로가 차단당한 당나라군은 원병도 요청하지 못하고 신라군이 몰래 간간이 보내주는 소금으로 버텨야 했다. 이들 고립된 당나라군에게 복신은 사신을 보내 “언제쯤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마땅히 사람을 시켜 전송해 드리겠습니다.”라며 야유를 보내고 있다.<br />
 
한편 4월경에 복신은 세 번째로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부여풍과 함께 왜국에 머무르고 있던 왕자 규해(糺解)를 맞이하고자 청했다.(《일본서기》)<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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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사후 [[신라]]시대에 와서 [[부여군]] [[은산면]]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발생하여 사람들이 죽어갔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여 마을 주민이 점쟁이를 데려다가 점을 쳐보자 백제 멸망 때 죽은 병사들의 원혼이 떠돌아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백제 부흥군의 유골을 수습하고 씻김굿을 지내주자 질병이 없어졌다 한다.
 
이후 [[부여군]] 은산 지역 사람들은 매년 음력 [[2월]] 별신제를 지내게 되었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이것은 [[은산별신제]]라 하며 [[대한민국]]에 와서 [[1966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되었다. 복신은 [[은산별신제]]에서 장군신으로 존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