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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 [[광복절]],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
'''3·1절'''(三一節, {{llang|en|The March 1st Day}})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운동]]을 기념하여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ref>법률 제7771호 국경일에 관한 법률</ref>이자 [[공휴일]]이다.
 
[[1946년]] [[3월 1일]] 제27회 기념식을 시초로 [[국가]] 경축일로 지정되었다.<ref>군정법률 제2호 경축일공포의관한건([[1946년]] [[2월 21일]])</ref>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2005년]] [[12월 29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 날에는 [[대한민국 정부|정부]] 주최로 3부 요인은 물론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여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헌법|헌법]] 정신인 [[3.1운동|3.1정신]]을 되새긴다. 이와 함께 [[대한민국|나라]]의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순국]]한 선열들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은 따로 [[파고다 공원]]에 모여 그 날의 깊은 뜻을 되새기는 [[의식 (문화)|의식]]을 거행한다. 또한 민간 차원의 갖가지 문화 공연도 이날에 베풀어지며, 전국 관공서 및 각 [[가정]]에서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를 게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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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은 [[1919년]] [[대한민국]]의 [[3.1운동|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족과 함께 시작한다. 1920년 2월 임시정부 [[내무부]] 주최로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 준비회를 설치하고 갖가지 행사를 준비하였다. 제1주년 3.1절은 임시정부 주최의 기념식과 [[교민|교민단]] 주최의 3.1절대축하식, 시가행진, 기념공연 등으로 성대히 축하되었고, 당시 임시정부의 기관지였던 [[독립신문 (대한민국 임시 정부)|독립신문]]은 이날을 [[국경일]]로 적으며 기쁘게 맞이할 것을 동포들에게 주문했다.
 
{{인용문|매 일요일과 국경일에 영국, 프랑스, 미국의 국기가 집집마다 날릴 때에 우리는 얼마나 그를 부러워하였던가. 동포들은 아이들까지도 수일 전부터 이 신성한 국경일의 준비를 하여 어제가 되자 아주 명절 기분이 되었다. (중략) 천만대에 기념할 우리 민족의 부활일인 오늘 하루를 무한히 기쁘게 축하하자! 놀자! <ref>[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657815 최초의 3.1절 기념식은 언제 어디서 열렸을까?]</ref>}}
 
3.1절 행사는 [[연해주]]와 [[만주]], [[미국]], 심지어는 [[일본제국|일본]]에서도 [[한국인|한인]]들에 의해 개최되었는데, 이들은 기념식을 가진 뒤 [[관악단|브라스밴드]]를 앞세워 퍼레이드를 벌였고, 기념 공연과 축포, 전단 살포 등의 다채로운 행사로써 [[3월 1일]]을 경축했다.<ref>3·1운동 기념 의례의 창출과 변화 (최선웅)</ref> 임시정부 시기 3.1절의 정식 명칭은 '''독립선언일'''이었으며, 이외에도 독립절, 혁명기념일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다.<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8&itemId=ij&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0&levelId=ij_002_0010_00080_021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獨立新聞 一九二○年 三月十八日 ]</ref> 3.1절이라는 명칭은 [[중화민국|중국]]의 [[쌍십절]]이나 미국 [[독립기념일]]의 별칭인 4th of July에서 따 온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서 열린 최초의 3.1절 행사는 해방 이후인 [[1946년]] [[보신각]] 앞에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주최로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승만]]의 개회사와 [[김구]]의 경축사, [[김규식]]의 선창 순으로 식전이 열렸으며, 이날을 경축하기 위한 음악회와 전시회, 예술공연, 체육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예술행사들이 베풀어졌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6030100209202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6-03-01&officeId=00020&pageNo=2&printNo=6909&publishType=00020 우리의 지도자·혁명투사들과 함께 맞이하는 다채로운 행사 (동아일보 1946.03.01)</ref> 그러나 3.1절 행사는 당대 좌익과 우익 진영 간의 분열 속에 치러졌으며, [[1947년]]에는 [[동대문운동장]]과 [[남산]]에서 각각 경축 행사를 거행하던 우익과 좌익이 충돌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ref>(최선웅) 같은 논문 머릿말 <3월 1일의 비극> 참조</ref>
 
[[1949년]]부터 3.1절은 4대 [[국경일]]로 지정되었으며, 이때까지만 해도 '''겨레 최대의 명절'''로 인식되고 있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3010020920101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3-01&officeId=00020&pageNo=1&printNo=7837&publishType=00020 "삼일절에 제하여" (동아일보 1949.03.01)]</ref> 정부 주최의 경축식 이외에도 [[대한민국 국군|국방군]]의 축하 비행, 예술제, 퍼레이드, 학예회, 체육회, 연극 등 다채로운 행사가 거행되었다.<ref>[대한민국정부의 3·1절 기념의례와 3·1운동 표상화(1949~1987) (최은진)</ref> 그러나 대부분의 경축 행사는 [[6.25 전쟁]]을 기점으로 사라졌으며, [[5.16 군사정변]]과 [[대한민국 제5공화국|5공화국 정권]]을 거치며 3.1절은 크게 천시되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30100209103006&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9-03-01&officeId=00020&pageNo=3&printNo=24131&publishType=00010 3.1운동 정권탄생 배경따라 달라져 (동아일보 1999.03.01)]</ref> [[1998년]] 이후로는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실시되어 사실상 유일한 3.1절 행사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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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가 [[작사]]하고 [[박태현]]이 곡을 붙인 [[작품]]으로 [[순국선열]]을 기리며 부르던 3.1절노래 가사다. 3.1운동이 일어날 당시([[1919년]]) [[한반도]]의 [[인구]]는 2000만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태극기 곳곳마다 3천만이 하나로”라는 [[노랫말|가사]]로 불린 3·1절 노래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한다.<ref>[http://www.news-stor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98 신현수 작가, '시로 쓰는 한국근대사' 펴냄] 박성례, 뉴스스토리(2012-03-20)</ref>
 
== 현대의 3·1절 ==
[[대한민국]]에서는 [[국경일]]로 지정되어 [[태극기]]를 게양하고 쉬도록 하고 있다. [[심야]]에는 종종 [[폭주족]]이 과속 운행을 할 때가 많은데, 이 때는 특히 [[경찰]]의 단속이 심해지며,<ref>{{뉴스 인용| url=http://tvnews.media.daum.net/part/societytv/200803/01/ytni/v20173908.html |제목=삼일절 심야 폭주 단속...90건 적발| 출판사=YTN| 날짜=2008-03-01}}</ref> 전국 초·중·고생 3천919명을 상대로 `3·1절 관련 학생인식에 관한 조사'를 한 결과 40%가 3·1절의 의미를 모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ref>{{뉴스 인용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145131|제목=초중고생 40% 3.1절 의미 잘 모른다 |출판사=[[연합뉴스]] |날짜=2010-02-28}}</ref>
=== 100주년 기념식 ===
3.1절 100주년을 맞이하기 위하여 [[문재인 정부]]에서는 [[2018년]] [[7월 3일]]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ref>[http://together100.go.kr/ #]</ref>를 발족하였다.<ref>[https://www.msn.com/ja-jp/money/other/3%C2%B71%EC%9A%B4%EB%8F%99%E3%86%8D%EC%9E%84%EC%8B%9C%EC%A0%95%EB%B6%80-100%EC%A3%BC%EB%85%84-%EA%B8%B0%EB%85%90%EC%82%AC%EC%97%85%EC%B6%94%EC%A7%84%EC%9C%84-%EC%B2%AB%EB%B0%9C/vp-AAzyaC0 3·1운동ㆍ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 '첫발']</ref>
 
[[2019년]] 3월 1일 3.1절 100주년를 맞이하여 전국 각지에서 행사가 개최됐다. 그 중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는 정부서울청사를 비롯한 인근 건물에는 대형 태극기가 내걸렸으며 문재인 대통령과 각부 장관, 각계 인사와 시민 약 1만 명이 참석하였다. 국민대표 33인의 행진과 독립선언문 낭독, 독립유공자 포상이 진행되었고, 독립유공자 334명에 대한 포상에서는 유관순 열사에게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정오에는 전국에서 동시에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타종과 만세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서울 보신각에서 열린 타종 행사에는 강제징용 피해자인 이춘식 씨와 유관순 열사의 조카 유장부씨 등 독립유공자 후손 12명이 참여하기도 했다. 서울광장 일대에서는 만세 행진과 공연이 이어졌고, 시민 3,000명이 참여한 대합창 행사도 열렸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tv.co.kr/MYH20190302002800038/?did=1825m|뉴스=연합뉴스TV|성=|이름=|날짜=2019-03-02|제목=3·1절 100주년…광장 채운 뜨거운 함성|출판사=|확인날짜=2019-03-0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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