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0 개의 출처 구조, 1 개의 링크를 깨진 것으로 표시 #IABot (v2.0beta10)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53번째 줄:
환국 직후에도 대종교는 번성했다. 50년대 후반 교도 수가 60만 명을 넘어섰고, [[삼일신고]], [[천부경]], [[참전계경]] 등 경전과 [[규원사화]], [[환단고기]] 등 역사서를 보급시켰다. 환국 이후 대종교는 민족 종교의 적통으로 인정받아 초대 정부의 제1 교단으로 등록되었다. 당시 대종교의 지식인들이 정부의 고위관리로 입각해 활동했다.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교육이념에 [[홍익인간]]이 채택되었고 단군 연호, 개천절, 한글 전용 등이 시행되었다.
 
민간에서는 대종교 중심으로 민족 행사들이 개최되어 [[1946년]] 광복 1주년 당시엔 대종교 총본사에서 채화된 성화가 남산 꼭대기에 점화되었다. 그해 [[개천절]] 행사에선 성화가 총본사에서 채화되어 [[마니산]] [[참성단]]까지 봉송, 점화되었다. [[홍익대]], [[단국대]], [[경희대]] 등이 대종교 교인에 의해 설립된 대학이듯이 대종교 역사 자체가 교육과 독립운동이었다. <ref>{{뉴스 인용|url=http://www.segye.com/newsView/20170815001496|제목=치열했던 항일투쟁 뒤에 민족종교 있었다|성명=정승욱 선임기자|날짜=2017-08-16|출판사=세계일보|확인날짜=2018-04-26}}</ref> <ref>{{뉴스 인용|url=http://news.donga.com/3/all/20180331/89390898/1|제목=‘肉彈血戰’ 외친 의군부 독립선언서, 抗日무력투쟁 불 댕겨|성명=안영배 기자|날짜=2018-04-09|출판사=동아일보|확인날짜=2018-04-26}}</ref> <ref>{{뉴스 인용|url=http://www.hankookilbo.com/v/0a301e081add4865acd452d19638062b|제목=독립운동 대부 ‘나철’ 애국혼 기린다|성명=하태민 기자|날짜=2016-10-31|출판사=한국일보|확인날짜=2018-04-26}}</ref>
 
== 정훈모의 단군교 ==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나철]]이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만주로 교단을 이동하자 정훈모가 이에 반발하여 단군교라는 교명을 고수하며 교단을 분리·독립하였다. [[나철]]이 교명을 바꿔 만주로 이동하게 된 계기가 정훈모를 중심으로 한 몇몇 친일분자들에 의한 교단 내분이었다.<ref>「한국종교사상사」, 대종교 창건사, 김홍철 저 연세대학교출판부(1998년, 145P ~148P 내용참조)</ref> 정훈모의 단군교는 [[단군]]을 신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였으며, 교단의 수뇌부에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된 [[친일파]]가 있었다. <ref>단군교부흥경략(檀君敎復興經略), 1책 82장, 신연활자본, 김재웅(金在雄) 교열, 정진홍(鄭鎭洪) 편집(1937년) 참조</ref> [[1912년]]에 내분이 일어나 교단이 둘로 나뉘었으나 1915년 정훈모가 교단을 재정비하였으며, 1930년에는 시흥에 단군전(檀君殿)을 세우고 본부를 이전하였다. 이후 내분이 이어지고 일제가 소수 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1936년에 폐교되고 신자들도 와해되었다.<ref>「한국종교사상사」, 대종교 창건사, 김홍철 저 연세대학교출판부(1998년, 119P ~139P 내용참조)</ref>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354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단군교] “[[1912년]] 이유형·서창보의 사리사욕 행위에 대한 시교사(施敎師)들의 비판과 교인들끼리의 주도권 쟁탈로 교단에 내분이 일어나자 정훈모는 [[1915년]]에 양분된 교단을 재정비하고 [[1930년]] 교당인 단군전(檀君殿)을 시흥에 세워 본부를 이전, 본부와 지부의 조직을 강화, 교전(敎典)을 간행하는 등 활발한 포교활동을 벌였지만 곧 자금문제로 신도들이 교주를 고발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일제의 무관심과 압력이 가해지자 시흥의 본부가 폐쇄되고, 정훈모가 사망하면서 각 지부는 독자적인 행동에 단군교는 와해로 소멸되었다.”</ref>
 
== 경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