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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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국 직후에도 대종교는 번성했다. 50년대 후반 교도 수가 60만 명을 넘어섰고, [[삼일신고]], [[천부경]], [[참전계경]] 등 경전과 [[규원사화]], [[환단고기]] 등 역사서를 보급시켰다. 환국 이후 대종교는 민족 종교의 적통으로 인정받아 초대 정부의 제1 교단으로 등록되었다. 당시 대종교의 지식인들이 정부의 고위관리로 입각해 활동했다.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교육이념에 [[홍익인간]]이 채택되었고 단군 연호, 개천절, 한글 전용 등이 시행되었다.
민간에서는 대종교 중심으로 민족 행사들이 개최되어 [[1946년]] 광복 1주년 당시엔 대종교 총본사에서 채화된 성화가 남산 꼭대기에 점화되었다. 그해 [[개천절]] 행사에선 성화가 총본사에서 채화되어 [[마니산]] [[참성단]]까지 봉송, 점화되었다. [[홍익대]], [[단국대]], [[경희대]] 등이 대종교 교인에 의해 설립된 대학이듯이 대종교 역사 자체가 교육과 독립운동이었다.
== 정훈모의 단군교 ==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나철]]이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고 만주로 교단을 이동하자 정훈모가 이에 반발하여 단군교라는 교명을 고수하며 교단을 분리·독립하였다. [[나철]]이 교명을 바꿔 만주로 이동하게 된 계기가 정훈모를 중심으로 한 몇몇 친일분자들에 의한 교단 내분이었다.<ref>「한국종교사상사」, 대종교 창건사, 김홍철 저 연세대학교출판부(1998년, 145P ~148P 내용참조)</ref> 정훈모의 단군교는 [[단군]]을 신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였으며, 교단의 수뇌부에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수록된 [[친일파]]가 있었다.
== 경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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