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좌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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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천하로 끝난 이인좌의 난은 영남지역을 조선 후기 정치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거병지는 청주였지만 남인들의 고장 영남에서 모의자와 동조자가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즉 안동 등 일부 지역의 사대부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거사에 심적으로 동조했던 것이다.
 
이인좌는 <s>선조 때 붕당을 예견했던 명재상 [[이준경]]의 후손이자</s> <ref>{{웹 인용|url=http://people.aks.ac.kr/index.aks|제목=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 한국학중앙연구원|확인날짜=2019-05-01}}</ref> 남인 [[윤휴]]의 손자사위여서 영남 유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난이 평정된 후 영조는 대구부의 남문 밖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영남을 반역향으로 못박았다.
 
== 영향 ==
소론(완론)이 이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긴 했다. 그러나 이 난의 주동자의 대부분도 소론 강경파(준론)이기에, 이 난으로 소론의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았으며, 이후 정권은 대개 노론에서 차지하게 되었다. 이 후 50여년에 걸쳐서 안동을 제외한 [[경상우도]] 사람들에게는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게 했으며, [[조식 (1501년)|조식]]의 문하인들은 벼슬길에 나아갈 생각을 갖지 못했다. <ref>한갑현, [http://www.kpanews.co.kr/article/show.asp?idx=155290 국익보다는 당익(黨益)을 앞세운 붕당정치], 약사공론</ref>
 
과거 응시가 허용된 뒤에도 필기시험 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