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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는 [[이승만]]의 집권시부터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미국에 충분한 군비(軍備)를 지원해 달라고 촉구해 왔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옛 친우이자 주일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1박2일의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한국 방위에 대한 확실한 지원을 얻어내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8101900329201015&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8-10-19&officeId=00032&pageNo=1&printNo=632&publishType=00020 大統領今日渡日]〉 경향신문(1948년 10월 19일) 1쪽. <!--“...李承晩大統領은 夫人 同伴하여 ... 聯合國總司令官 「맥아더」元帥에 對한 答禮次로 드디어 今 十九日 今朝 金浦空港을 떠나 東京으로 向發하였는데...이번 同行하는 隨行員은 다음 같다. 鄭翰景 博士 秘書 金良千氏 公報處長 金東成氏 公報局長 李貞淳氏”--></ref><ref name="비록한국외교28">{{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17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17&officeId=00032&pageNo=4&printNo=9068&publishType=00020 | 제목 = 秘錄 韓國外交<28> : 政府樹立 직후 ⑩ | 날짜 = 1975-03-17 | 출판사 = 경향신문}}</ref> 이승만이 귀국한 다음날, [[대한민국 제헌국회|대한민국 국회]]는 주한미군 철수문제에 대해 〈미군 주둔에 관한 결의]〉<ref>〈[http://likms.assembly.go.kr/kms_data/record/data1/1/001za0109b.PDF 미군 주둔에 관한 결의]〉(1948년 10월 21일)</ref> 등을 통해 이것을 저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유엔 총회]]에서 한국 내 외국군대 철수가 결의되자(1948년 12월 12일)<ref>[[:s:en: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Resolution 195|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Resolution 195]] <!--3. Recommends that the occupying powers should withdraw their occupation forces from Korea as early as practicable;--></ref> 1948년말부터 미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의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 요구에 대해 [[미국 국무성]]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승만은 맥아더를 다시 찾아갈 결심으로 1949년 1월말, [[변영태]] 특사를 맥아더 사령부에 보냈으나<ref>《경향신문》(1949년 1월 29일자) 1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12900329201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1-29&officeId=00032&pageNo=1&printNo=719&publishType=00020 駐比 特使에 卞榮泰博士]〉 <!--“駐比 特使로 任命되었던 尹致暎氏의 固辭로 因하여 後任에 卞榮泰博士를 지난 二十七日附로 決定 任命하였다고 政府에서 二十八日 發表하였다.”--></ref><ref>《경향신문》(1949년 2월 3일자) 1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49020300329201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49-02-03&officeId=00032&pageNo=1&printNo=723&publishType=00020 卞駐比特使 卄七日出發]〉 <!--“駐比特使 卞榮泰氏는 오는 七日 金浦空港을 出發하여 途中東京에서 二日間滯留後 任地 「마니라」로 向할 豫定이라 한다.”--></ref> 맥아더는 "내 임무는 명확히 규정되어 카르빈 한 자루도 넘겨줄 수 없다"면서 [[딘 애치슨]](국무장관 서리)만을 비난했다.<ref name="비록한국외교28"/><ref>변영태 저, 외교여록에서</ref> <!--인용문: “따라서 北傀의 도발을 우려한 李대통령은 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을 요구했으나 美국무성은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결국 그는 그의 옛친우인 매카더장군을 다시 찾아갈 결심으로 1949년초 卞榮泰 특사를 매카더사령부에 보냈으나 매카더는 『내 임무는 명확히 규정되어 카르빈 한 자루도 넘겨줄 수 없다』면서 애치슨 국무장관만을 비난했다(外交餘祿 卞榮泰著).”-->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과의 군사원조 교섭을 비밀리에 실천하라는 지시에 따라, 주미 대사 [[장면]]은 [[트루먼|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 의회내 극우파 의원들을 집중적으로 만났다. 이에 대하여 미국 국무성의 극동담당 차관보인 월튼 버터워스([[:en:William Walton Butterworth|W. Walton Butterworth]])는 장면 대사를 경고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3260032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26&officeId=00032&pageNo=4&printNo=9076&publishType=00020 | 제목 = 秘錄 韓國外交<32> : 政府樹立 직후⑭ | 날짜 = 1975-03-26 | 출판사 = 경향신문}}</ref> 1949년 6월 14일 장면은 [[딘 애치슨]]과 회담하고 무기 원조를 요청하였다. <!--회담의 결과--> 결국, 주한미군에 대한 소련의 날카로운 비난도 겹치고 해서 미국은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의 자격으로 500여명의 병력만 남겨 놓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을 완전히 철수시켰다.<ref name="비록한국외교28"/><!--인용문: “이듬해 6월29일 駐韓美軍의 마지막부대가 仁川항을 떠날 때...”--> 1949년 12월 중순, 이승만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한일 병합 조약|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미국은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ref>유영익 외 《한국과 6.25전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9) 264페이지</ref> 1950년 1월 20일, 장면과 극동 차관보 버터워스가 다시 만났으나, 미국은 의회 동의 없이는 한국 원조를 위한 예산을 편성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ref name="images.library.wisc.edu">{{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7.pdf | 제목 = FRUS 1950 Vol. VII Korea |쪽=11-14 }}</ref> 이승만은 부인 프란체스카를 시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맥아더에게 보내기도 했다. "존경하는 장군...부디 우리국민을 도와주십시오... 지금 우리내외는 장군의 협력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ref>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이승만 : 신화에 가린 인물(Syngman Rhee : The Man Behind the Myth)》(1954) {{쪽|날짜=2013-08-08}}</ref> 프란체스카의 편지를 받은 맥아더는 때마침 대일 청구권 관계로 대일 강경책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던 이승만에게 한-일 관계개선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기 위해 다시 이승만을 초청했다. 무초 주한 미국 대사로부터 맥아더 장군의 초청을 통보받은 이승만은 1950년 1월 21일 [[임병직]] 외무부장관, [[장기영 (1903년)|장기영]] 체신부장관, [[고재봉]], [[김광섭]] 두 비서, 무관으로 [[정일권]] 대위를 대동하고 두 번째로 맥아더의 애기(愛機) 바탄호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맥아더는 그러나 이때도 이승만의 한국방위에 대한 주장을 고무해주었으나 무기지원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회피했다.<ref name="비록한국외교28"/>
 
이처럼, 미국은 북한의 남침준비에 대한 한국측의 정확한 정보를 경시하고,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의 의도가 무력북침에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필요한 정도의 군사원조도 제대로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미국은 주한미군이 사용하던 각종 장비 및 무기의 일부만을 양도한 데 이어,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군사원조를 위해 1949년 10월 제정한 상호방위원조법안의 일환으로 한국군 장비를 유지 · 보수하는 데 필요한 원조만 제공해 주고 1950년 1월 21일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ref name="글로벌 한미관계 초창기의 대미외교"/> <!--인용문: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남침준비에 대한 한국측의 정확한 정보를 경시하고, 오히려 이대통령의 의도가 무력북침에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필요한 정도의 군사원조도 제대로 제공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미국은 주한미군이 사용하던 각종 장비 및 무기의 일부만을 양도한 데 이어, 아시아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위해 1949년 10월 제정한 상호방위원조법안의 일환으로 한국군 장비를 유지·보수하는 데 필요한 원조만 제공해 주고 1950년 1월 21일 한미 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또한 미국은 소련세력의 서유럽에의 팽창저지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터였으므로 북한 정복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 실상 1949년 12월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중화민국]] 정부를 옮겼고 중국 대륙을 [[중국 공산당]]이 장악함으로써 소련 이외에도 [[중화인민공화국]]이 북한측에 국경을 접하게 되었으므로 북진통일은 한층 더 어렵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의 대한정책(對韓政策)은 군사력의 증강보다도 서구의 부흥을 모방한 경제부흥을 최우선 정책으로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의 북진통일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하기는 곤란했다.<ref>{{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한국과 미국의 관계〔서설〕|한국과 미국의 관계〔서설〕]]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 <!--그러나 미국은 소련세력의 서유럽에의 팽창저지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터였으므로 북한 정복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 실상 1949년 12월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축출이 되고 중국 본토를 중국공산당이 장악함으로써 소련 이외에도 중국이 북한측에 국경을 접하게 되었으므로 북진통일은 한층 더 어렵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의 대한정책(對韓政策)은 군사력의 증강보다도 서구의 부흥을 모방한 경제부흥을 최우선 정책으로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대통령의 북진통일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하기는 곤란했다.-->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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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19일, 미국 CIA는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ref name="cia_mistake">[http://news.kbs.co.kr/world/2010/06/16/2113578.html#// CIA 한국전 잇단 오판, 수장까지 교체] {{웨이백|url=http://news.kbs.co.kr/world/2010/06/16/2113578.html#// |date=20131111051837 }}, KBS, 2010.06.16.</ref>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이 무방비 상태인 대한민국을 침범함으로써, [[한국 전쟁]]이 발생하였다. 전쟁 발발에 관한 주일 [[연합군 최고사령부]] 사령관 맥아더의 최초의 보고는 워싱턴 시간으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5시(한국시각 18시), 침공이 개시된지 14시간 뒤에 육군성본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의 요청에 따라 개전당일부터 합참의 지시도 받지 않고 한국군 지원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051000329204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05-10&officeId=00032&pageNo=4&printNo=12189&publishType=00020 〈맥아더傳記3部「勝利와 不幸」(1945~64)(下)〉]《경향신문》 1985년 5월 10일 5쪽. <!--“한국전 발발에 관한 맥아더의 최초의 보고는 워싱턴 시간으로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5시, 침공이 개시된지 14시간 뒤에 육군성본부에 도착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주한미(駐韓美)군사고문단(KMAG)의 요청에 따라 개전 당일부터 합참의 지시도 받지 않고 한국군지원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ref>
 
주미 대사 [[장면]]도 대한민국 정부의 긴급훈령을 받아 [[미국 국무성]]에 알려 사태의 절박성을 전하였다. 6월 25일 저녁 장면은 이승만과 통화 후, 미국의 상 · 하원을 찾아다니며 한국 파병을 역설하였고, 이후 [[유엔]]과 국제사회에 [[조선인민군]]의 남침을 알리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줄 것을 설득하여 [[미군]]과 유엔군의 한국 파병을 이끌어냈다. [[미국]]은 [[유엔]] [[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선인민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ref>{{서적 인용 |인용문=이에 따라~(유고슬라비아는 기권) |저자=이기택 |제목=국제정치사 |출판사=일신사|연도=2000 |쪽=471~472}}</ref> 6월 26일 장면은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만나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고, 6월 27일의 미국의 대북한 선전 포고와 유엔에 대한민국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여 유엔군의 한국 전쟁 참전결정을 이끌어냈다. 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 [[강준만]] |제목=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쪽=50~51|인용문=<!--경무대 비서 민복기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은 26일밤 10시 반경 동경에 있는 미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었다. … 당신네들이 빨리 우리를 도와 주지 않으면 여기 한국에 있는 미국인 2천500명을 우리가 다 죽이겠소.’ …54)… 54) 이한우,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하(下)』(조선일보사, 1996), 78~79에서 재인용. --> }}</ref> 미국과 UN은 대한민국 영토에서 [[조선인민군]]을 철수하라는 결의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에 통고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6월 27일 UN 안보리 이사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한국 땅에서의 즉각 철수를 권고하였다. "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7대 1(기권2)로 결의했으며, 이 날 [[해리 S. 트루먼]]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군 및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하라"고 명령했다.<ref>{{서적 인용|인용문=회원국들에게 군사 공격을~|저자=김창훈|제목=한국외교 어제와 오늘 |출판사=[[다락원]]|연도=2002|쪽=50}}</ref>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참전 시에 의회가 선전포고를 결의한 것과는 달리, 한국 전쟁에 있어서는 [[트루먼|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해외파병권에 의하여 참전을 결정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4120100329201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4-12-01&officeId=00032&pageNo=1&printNo=12057&publishType=00020 餘滴: 애치슨 라인]〉 《경향신문》(1984년 12월 1일) 1면. <!--“... 한국전쟁수행은 議會선전포고권을 피한 대통령의 해외派兵權에 의해서 다뤄졌었다. ... 미국은 이러한 도전을 대통령에게 주어진 「大權」에 따라 대처했다. 그것은 그후 미국의 해외파병과 참전의 길을 무한정하게 연 先例가 됐다.”--></ref> 1950년 6월 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국 국무부|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ref name="야마">[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6041470133 일 산케이신문, 일 산케이신문, "50년 일본 야마구치에 이승만, 망명정부 구상" ] 조선일보 1996년 4월 14일</ref> 6월 28일 [[서울특별시|서울]]은 [[조선인민군]]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장면]]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통해 유엔 결의 사항 등을 본국에 방송하였다. 맥아더는 6월 29일 하네다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와서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하고 워싱턴에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였다.<ref>서규화,〈[http://www.army.mil.kr/gbbs/gunsa/pdf/122.pdf 6.25전쟁시 미 제24사단의 초기지연작전 재조명]〉 [[대한민국 육군|육군본부]], 《[[군사연구]]》 제122집(2006년). 78쪽. <!--“6월 27일부로 한국전쟁에 대한 작전권을 부여받은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 06:10에 한국 전선을 직접 시찰하기 위해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sup>8)</sup> 맥아더 장군 일행은 수원에 도착하여 처치 장군으로부터 전쟁 상황을 보고받은 후, 직접 전투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한강방어선지역을 시찰했다. 여기서 맥아더 장군은“미 지상군전투부대가 투입되어야만 대한민국을 침략군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워싱턴에 미지상군 투입을 긴급히 요청했다.<sup>9)</sup>...8) Paige, The Korean Decision June 24-30, 1950, pp.229-230, 이때 맥아더 장군을 수행한 참모들로는 참모장 알몬드 장군, 작전참모부장 라이트 장군, 정보참모부장 윌로비 소장, SCAP의 정치국장 휘트니 준장,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래트메이어 장군 등 15명이었다. 9) Paige, The Korean Decision June 24-30, 1950, pp.236~237, 이때 워싱턴 당국에 요청한 주요내용은 “현 전선을 유지하고 실지를 회복하는 길은 미 지상군을 투입하는 일이다. 허락만 해준다면 이 지역에 1개 연대전투단을 지원군으로 보내고, 이미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주일미군 2개 사단을 증강시켜 반격작전에 투입할 것이다”이다.”--></ref><ref>Glenn D. Paige, 《The Korean decision, June 24-30, 1950》 Free Press, (1968) 229-230쪽.</ref><ref>Glenn D. Paige, 《The Korean decision, June 24-30, 1950》 Free Press, (1968) 236~237쪽.</ref>
 
한국군은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트루먼|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에 따라(6월 30일),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규슈]]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 육군]] [[:en:24th Infantry Division (United States)|제24사단]] 21연대가 [[부산광역시|부산]]에 상륙했다.(7월 1일) <ref>Varhola, Michael J. (2000). 《Fire and Ice: The Korean War, 1950–1953》 Mason City, Iowa: Da Capo Press. {{ISBN|978-1-882810-44-4}}. 2쪽.</ref> 이 부대는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Charles B. Smith)[[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졌다.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평택시|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조선인민군]]과 첫 교전을 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오산 전투]]) <ref>[[강준만]], 앞의 책, 68쪽.</ref> [[스미스 부대]]의 무참한 패배로 미국 지상군의 전선 투입이라는 위세만으로 조선인민군의 남침이 중단되기를 바랐던 [[더글러스 맥아더]]나 윌리엄 딘의 한가닥 기대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ref>{{서적 인용|저자=전쟁기념사업회|제목=《한국전쟁사》 1권|출판사=행림출판|연도=1992|쪽=196~197}}</ref> 나중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뒤를 이어 유엔군을 지휘하게 되는 [[매슈 리지웨이]]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침공군의 세력을 잘못 판단했으며 [[인민군]] 10개 정예사단 앞에 1개 대대를 투입한 것은 맥아더의 지나친 오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스미스 부대의 참패를 성공이라고 자평했다. 미 지상군 참전에 예기치 않던 인민군이 미군 참전을 직접 목격하고 소련 전법에 따라 일단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미군은 10일을 벌었다는 것이다.<ref>{{뉴스 인용 |제목 = 40년 만에 다시 풀어보는 6ㆍ25의 수수께끼:4 |url = http://www.kinds.or.kr/ |출판사 = 한국일보 |저자 = 정일화 |쪽 = 5|날짜 = 1990-06-20 <!--url없이 사용됨 |확인날짜 = 2008-04-09-->}}</ref>
 
전쟁발발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 7월 10일,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ref>{{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9.pdf | 제목 =The United States Representative at the United Nations (Austin) to the Secretary of State |인용문=<!--He said that 38th parellel was meaningless and that liberation and unification of all of Korea was essential, after which there should be UN supervised elections for whole country.--> |웹사이트=FRUS 1950 Vol. VII Korea |출판사=[[미국 국무부]] |쪽=354 }}</ref> 7월 13일,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조선인민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ref>{{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9.pdf | 제목 =Memorandum by the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 (Allison) to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 (Rusk) |인용문=<!--...the action of the North Korean forces had obliterated the 38th parallel and that no peace and order could be maintained in Korea as long as the division at the 38th parallel remained.--> |웹사이트=FRUS 1950 Vol. VII Korea |출판사=[[미국 국무부]] |쪽=373 }}</ref>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ref>{{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9.pdf | 제목 =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Embassy in Korea |인용문=<!--16. Press report June [July] 13 quotes Pres Rhee as voicing determination ROK not to stop at 38th parallel in repelling invaders.--> |웹사이트=FRUS 1950 Vol. VII Korea |출판사=[[미국 국무부]] |쪽=387 }}</ref> 이승만의 이 언명은 미국을 크게 놀라게 하여 [[딘 애치슨]]으로 하여금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에 게 그러한 언명을 모든 것을 다해 어떻게든 막으라는 전문을 화급히 치도록 했다. 미국은 38선에서 정지할 것이며, 조선인민군을 그렇게 하였듯이, 대한민국 국군을 그곳에서 막을 것이라는 미군의 성명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무초에 따르면, 그는 노 정객 이승만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민들은 전전부터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부의 몰락 이후 깊은 절망에 빠져들어 우리는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을 저지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ref>{{웹 인용 |url = http://www.trumanlibrary.org/oralhist/muccio1.htm |제목= Oral History Interview with John J. Muccio |출판사= Harry S. Truman Library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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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김현철 (1901년)|김현철]] (金顯哲)|| || [[1964년]] [[12월]] - [[1967년]] [[10월]] || 전 대통령 고문,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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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김동조]](金東祚) <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7091600209201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7-09-16&officeId=00020&pageNo=1&printNo=14129&publishType=00020| 제목 = 12國大使任命의결 | 날짜 = 1967-09-16 | 출판사 = 동아일보 |인용문 = 國務會議는 16일 駐美·駐英·駐日·駐獨大使를 포함해서 12개國駐在大使를 새로 任命키로 議決했다. 이날 議決된 大使級의 大幅移動은 朴大統領의 決裁가 나는대로 月內에 發令케 되었다. … ▲駐美 大使〓金東祚(49·外務次官·駐日大使)}}</ref> || || [[1967년]] [[10월]] - [[1973년]] [[12월]] || 전 주일본 대사. 외무부장관으로 발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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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함병춘]](咸秉春) || || [[1973년]] [[12월]] - [[1977년]] [[4월]] || 전 대통령 정치담당 특별 보좌관. 이후 연세대 교수로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