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진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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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당시 [[조선]]과 [[명나라]] 정벌을 계획하고 있던 [[일본]]의 태합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정벌을 명령한다.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소 요시토시]]와 [[마쓰라 시게노부 (1549년)|마쓰라 시게노부]] 등의 병력 1만 8700명이 병선 700척을 이끌고 [[부산]] [[영도]]에 상륙한다.
 
그 모습을 본 경상좌수사 [[박홍 (1534년)|박홍]]은 배를 모두 가라앉히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른 뒤 도망쳤고 경상우수사 [[원균]]도 부하에게 우수영을 맡겨 놓고 도망쳤다. [[1592년]] [[5월 24일]]([[음력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군이 [[부산진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공격했다.
 
== 전투 ==
전투는 오전 5시~7시에 첫 전투가 벌어졌다. <ref> 당시 일본군을 따라 참전한 [[포르투갈]] 선교사의 기록</ref> [[부산진성]]을 지키는 장수 부산진 첨사 [[정발 (1553년)|정발]]은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으며, 오전 10시~12에 2차 전투 끝에 4시간 만에 [[부산진성]]은 함락되었다. 부산진 첨사 [[정발 (1553년)|정발]]은 머리에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부산진성]] 안의 군민들 역시 끝까지 저항했고 그 결과 군민 3000명이 모조리 죽거나 학살되었다.[[정발 (1553년)|정발]]이 전사한 후 1598년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채 7년 전쟁이 끝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