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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활동 ===
==== 해방 정국 활동 ====
[[1945년]] [[9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참가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45년 [[11월]] 북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 되었다. [[1946년]] [[북조선민주당]] [[평안남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에 선출된 데 이어 <ref>1946년 2월 8일~: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214쪽</ref> [[1946년]] 당시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의 전신인 북조선기독교연맹 중앙위원장에 피선되고, 46년 2월 8일 소련 점령군 사령부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켜 소련군정 관내에서 사실상의 단독 정부로 기능케 할 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의 모체가 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이 되었다.<ref>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29</ref> 2월 8일 평양 체재중 서울에서 조직된 민족주의민주전선의 대의원에 추대되었다.
 
그해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보낸 [[백의사]] 자객에 의해 암살위기를 모면하였으나 그의 아들, 며느리, 딸이 피살당하였다. 이때 강량욱의 장남과 맏며느리는 머리에 관통상으로 현장에서 죽었고, 딸이 어깨에서 가슴으로 총알이 관통하여 사망했으며, 부인 송석정은 머리를 다쳤고 강량욱은 팔을 다쳤다. 당시 강량욱의 아들의 중매를 서주러 온 김득호(金得鎬) 목사와 강병석(康炳錫) 목사 외에도 손님 2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그 중 한명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다른 한 명은 후유증을 앓다가 2년 8개월 뒤에 사망했다. 이후로는 목사 관저에서 로동당원들의 사택으로 이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