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175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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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천주교와의 만남 ===
자(子)를 자술(子述), 호를 만천(蔓川)이라 하였고 본관은 [[평창 이씨|평창]](平昌)이다. 그는 1756년(영조32) 서울의 [[남인]] 학자의 가문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ref>《평창이씨세보(平昌李氏世譜)》</ref>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20세 전후에 고명한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780년]]([[조선 정조|정조]] 4년) [[사마시]]에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다. <ref>〈[[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43행 참조. </ref> 당시 남인 학자들 사이에는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西學)이 단순한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점차 그 뛰어난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러 하나의 실천학으로 받아들여 마침내 그리스도 신앙으로 귀의(歸依)해 가는 뚜렷한 움직임이 있었다.
=== 세례 ===
[[1783년]](정조 7년) [[황인점]](黃仁點)을 정사(正使)로 하는 사절단이 구성될 때, 그의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은 서장관(書狀官)으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북경]]에 가게 되었는데, 그도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ref>[[#정조실록 1805|정조실록 1805]]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03_002 33권, 정조 15년 11월 3일 갑술 2번째기사] " 그 아버지의 사행(使行)에 따라가 수백 권의 사서(邪書)를 널리 가져와 젊고 가르칠 만한 사람들을 그르친 자가 있으니, 바로 평택 현감 이승훈이 그 사람입니다. "</ref> 그가 떠나기 전, 천주학을 연구하던 친밀한 친구 [[이벽]]이 그를 찾아와 교리와 그 실천 방법을 자세히 살피고 올 것과 천주교에 관한 서적을 구해 올 것을 부탁하였다.<ref>[[#샤를르 달레 (1874)|샤를르 달레 (1874)]] 247~48쪽 "Son fils Seng-houn-i, l'un des amis intimes de Piek-i, devait l'accompagner dans ce voyage."</ref> 세계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민족적 자진 귀의의 특사로서 이승훈은 이해 [[11월 8일]]([[음력 10월 14일]]) 한양을 떠나 [[1784년]] [[1월 13일]](1783년 [[음력 12월 21일]]) 북경에 도착했다.<ref>[[#정조실록 1805|정조실록 1805]] [http://sillok.history.go.kr/id/kva_10802017_004 17권, 정조 8년 2월 17일 계유 4번째기사]</ref> 40여 일 동안 이곳에 머무르며 즉, [[천주교회]]나 [[성공회]]에서 [[주교]]가 목회하는 교회를 뜻하는 주교좌(主敎座)성당인 남천주당에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운 후, 1784년 [[음력 1월]] 이승훈은 [[그라몽]](Jean 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조선 [[천주교회]]의 주춧돌이 되라는 뜻에서 [[베드로]](반석)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784년]](정조 8년) [[4월 13일]]([[음력 3월 24일]]) 이승훈은 [[성서]]와 [[성상]]·[[묵주]] 등을 가지고 [[한양]]에 돌아왔다.
 
=== 천주교회를 세우다 ===
마침내 [[1785년]](정조 9년) 봄 명례동(明禮洞 : [[명동]])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처음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세웠다. [[이벽]]·[[이가환]] 및 [[정약용]]·[[정약종]]·[[정약전]] 3형제와 함께 주일 [[미사]]와 [[강론]]을 행하면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천주교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한, 이승훈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북경 교회 체제를 인용해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정약전]]·[[최창현 (1754년)|최창현]](崔昌顯)·[[유항검]](柳恒儉)·[[이존창]](李存昌) 등 10명에게 신부직을 수행하게 해 교회를 운영해 나갔다.([[1786년]], [[가성직제도]])<ref>{{백과사전 인용|제목 = 권일신|백과사전 = 두산 엔싸이버 백과사전|확인날짜 = 2016-02-08|url = http://100.naver.com/100.nhn?docid=24352 |인용문= 그 뒤 권일신과 이승훈 등은 1786년부터 이른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성직제도를 만들어 운영하며 포교 활동을 펼쳤다. ...이승훈에게 견진성사(堅振聖事)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권일신·최창현(崔昌顯)·유항검(柳恒儉)·이존창(李存昌) 등이 사제로서 각 지역에서 성사를 집전했다.}}</ref><ref>[[#이덕일 (2009)|이덕일 (2009)]] 441쪽. "이승훈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북경 교회 체제를 인용해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權日身, 정약전 등 10명에게 신부직을 수행하게 해 교회를 운영해 나갔는데, 이를 정식 신부가 맡은 체제가 아니라는 뜻의 가성직 체제라고 한다."</ref> 그는 [[1790년]] [[음력 10월]]에 음서로 비로소 관직에 나가 [[의금부]] 도사(都事)가 되었고<ref>《[[승정원일기]]》, 정조14년 庚戌 10월 2일조.</ref> [[1791년]](정조 15년, 신해년) 2월 서부도사를 거쳐<ref>《[[승정원일기]]》, 정조15년 辛亥 2월 9일조.</ref> 이 해 6월에 평택현감이 되기도 하였으나, <ref>《[[승정원일기]]》, 정조15년 辛亥 6월 24일조.</ref> 마침내 [[천주교]]의 전국적 전파를 막으려는 조정의 탄압으로 [[신해박해]]가 일어나 관직이 박탈되었다.(음력 11월)<ref>[[#정조실록 1805|정조실록 1805]] [http://sillok.history.go.kr/id/kva_11511008_006 33권, 정조 15년 11월 8일 기묘 6번째기사]</ref> [[1795년]] [[주문모]] 신부 입국 사건으로 충남 [[예산군]]에 유배되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서대문 형장에서 [[사형]]되었다. [[1868년]] 그의 뒤를 이어 아들과 손자가 [[순교]]하고, [[1871년]] 증손까지 순교하여 4대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되었다.<ref name="글로벌">《[[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근대사회의 태동/종교의 새 기운/천주교의 전파와 교세 확대#이승훈|이승훈]]〉 </ref>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