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니츠 선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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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선언은 망명 귀족을 매우 기쁘게 했고, 역시 [[루이 16세]]의 또다른 동생 [[프로방스 백작]]이 [[9월 10일]] 헌법 비준에 반대하는 맹렬한 항의 성명을 내고 협박의 강도를 더했다.
{{인용문2|만약 광신적인 악업으로 전하([[루이 16세]])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외국 열강의 군대가 파리를 초토화시킬 것임을 파리 시민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혁명파의 분노를 사서, 온건한 정당인 지롱드 당에서도 주전파라는 그룹이 등장하여 외국과 싸워 국왕의 반혁명을 폭로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애국심의 고양은 파리의 [[상 퀼로트]]들을 더욱 과격하게 자극했다. <ref>{{서적 인용 |저자 = 김용구 |제목 = 세계외교사 |초판 = 1989 |판=1995(上•下 合本) |출판사 = 서울대학교 출판부 | id={{ISBN|89-7096-413-4}} |쪽= 2 |인용문 =이러한 분위기에서 루이 16세가 바렌느(Varennes)지방으로 도피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하여 프랑스국민들의 국왕불신은 날로 커지게 되었다. 이에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Marie Antoinette)의 오빠인 레오폴드 Ⅱ세는 좌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드디어 프로이센 국왕 윌리엄 Ⅱ세(Frederick William)와 함께 1791년 8월 필니츠(Pillnitz)선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양국은 프랑스국왕문제는 유럽 전체의 관심이며 따라서 유럽 전체가 공동으로 프랑스혁명에 대처해야 한다고 천명함으로써 프랑스간섭의 단서가 되었다. 프랑스국민들은 이 선언을 일종의 협박으로 받아들였고 열강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고조되었다.}}</ref>
 
어쨌든 필니츠 선언은 프랑스 혁명이 유럽 전체를 둘러싼 전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