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令和人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출처 필요|날짜=2013-10-01}}
{{다른 뜻|조공 (청하도왕)}}
'''조공'''(朝貢)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과 서로 예물을 바치는 무역 행위를 말하며 유럽의 경우에는 트리뷰트(Tribute)라고 불르며 Tribute의 경우에는 로마 제국이나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영토에 공작이나 선제후들을 임명하고 제국에 대한 의무로서 세금이나 공물을 바치는 봉건적인 시스템이다.
 
줄 37 ⟶ 35:
고려의 경우에는 중국 왕조와 교역하기 위해 이런 제도를 채택했지만 국가로서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해동천자"라는 황제국 체제를 보여주었고 왕을 종(宗)이라 하는 황실 예법을 사용하였다. 이를 외왕내제라고 하기도 한다. 또한 고려의 사신들은 사신의 의례에서 중국 왕조와 이민족 왕조들의 사신들과 대등한 서쪽에 자리잡았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북조를 세운 다른 이민족들과 같이 천자를 자칭하고 다른 국가들에 조공을 받았다. 이민족들이 건국한 북조도 천왕(天王)이라는 천자를 내세우고 중국인들에게 조공을 받았다.
 
일부조공은 조공품에는무역으로 해당사례의 하는 사례를 한경우도 있었다 명사형식이다. 조선전명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공마 3천필이 요동에 도착하자 15,000필의 견포 즉 비단과 포목을 하사하여조선측에 값을주어 말값을 치루어 주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jo_023r_0010_0010_0260 ] 심지어 해당 기록에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말값 15,000필의 비단과 포목은 언급이 없다고 하지만 명실록에는 나와있다고 주석까지 달려있다.</ref> 또한 1393년 명사 조선전의명사의 기록을 보면 공마 9,800필을 조선측에서 진상하자건내자 명측에서명나라측에서 1만 9,700필의 모시와 면포를 조선측에 주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이 [[청나라]]와는 조공 무역 시스템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라는 국가를 인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벌을 계획한다.
 
또한 한국의 왕조도 주변 민족으로부터민족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은 경우가 다수 확인된다. [[삼국 시대]]에 고구려에게 복속해 있었던 [[말갈]], [[거란]], 중국 왕조인 [[북연]] 등등이 고구려에 조공을 하였고바쳤고 발해 또한 복속된 [[말갈]]제부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고려]]는 [[여진]], [[탐라]]에게 조공을 받았고, [[조선]]도 여진이나 [[류큐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드물게 일본의 조공을 받은 기록이 있으나, 이는 중앙정부 차원의 그것은 아니었다.
[[청나라]]때에는 조선이 조공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를 인정하지 못하였기때문이다.
 
또한 한국의 왕조도 주변 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은 경우가 다수 확인된다. [[삼국 시대]]에 고구려에게 복속해 있었던 [[말갈]], [[거란]], 중국 왕조인 [[북연]] 등등이 고구려에 조공을 하였고 발해 또한 [[말갈]]제부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고려]]는 [[여진]], [[탐라]]에게 조공을 받았고, [[조선]]도 여진이나 [[류큐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드물게 일본의 조공을 받은 기록이 있으나, 이는 중앙정부 차원의 그것은 아니었다.
 
=== 일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