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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가와 잇켄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의 외교 체제가 정비되고 후추(府中)의 이테이안(以酊庵)에 교토 5산(京都五山)의 선승(禅僧)들이 번갈아 부임해 외교문서를 맡는 「이테이안 윤번제」(以酊庵輪番制)가 확립되는 등 막부의 통제도 강화되었다. 간분(寛文) 3년([[1663년]])에 쓰시마 번은 다섯 척의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조성하였는데, 오늘날 「오후나에 터」(お船江跡)라는 유적으로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보다 2년 전인 간분 원년([[1661년]]) 仁位郡検地라 불리는 토지조사가 실시되었다. 쓰시마 번은 10만 석 수준의 다이묘로 간주되었지만 실제 쓰시마의 지형과 환경상 쌀 4500석에 보리 15,000석 정도가 쓰시마의 실제 수입이었고 번의 수입은 대부분 조선과의 교역으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경작지 면적 내에서 가장 많은 것은 밭이었고, 다음으로 「고바」(木庭)라 불리는 화전이었으며, 검지(토지조사)에서는 「고바」도 백성지고(百姓持高)<ref>일본 에도 시대에는 검지 즉 토지조사에 따라 품등을 매겨 수확고가 정해졌고, 이를 마을별로 집계해 토지대장에 해당하는 검지장을 작성하였다. 이 검지장의 조사 내용을 기준으로 무라타카(村高)가 결정되었으며 이것이 책정된 땅을 다카우케치(高請地)라 하였다. 이 다카우케치를 소지하고서 검지장(検地帳)에 등록된 농민을 백성지고 또는 고지백성이라고 하였으며, 줄여서 본백성(本百姓)이라고도 하였다.</ref>로 포함되었다. 또한 석고(石高) 제도 대신 겐다카(間高) 제도라는 특별한 생산단위가 채용되었다.<ref name=tbs/>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조일무역과 은 광산의 융성으로 쓰시마는 큰 번영을 누렸고, [[아메노모니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나 [[스야마 도쓰안]](陶山鈍翁), 마쓰우라 가쇼(松浦霞沼) 등의 인재도 배출되었다. 당시의 소 씨의 번영은 쓰시마 소 씨의 보리사(菩提寺)였던 반쇼인(万松院) 뿐 아니라 가이진 신사(海神神社)나 와다쓰미 신사(和多都美神社)의 장려함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ref>『ランドジャポニカ』(1996)p.747</ref> 조쿄(貞享) 2년([[1685년]]) 번주 소 요시자네(宗義真)가 후추에 「소학교」(小学校)라는 이름이 붙은 [[학교]]를 세워 가신의 자제들에 대한 교육을 맡게 하였는데, 이는 일본에서 「소학교」(小学校, 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교육기관이다)라는 이름의 시설이 설치된 최초였다.<ref name=shinbun>[http://www.tsushimanews.com/ 対馬ポータルサイト]{{リンク切れ|date=2017년10月 |bot=InternetArchiveBot }}(対馬新聞社)</ref> 18세기 초에는 스야마 도쓰안의 힘으로 10년 가까운 「이지카오이쓰메」(猪鹿追詰, 해수구제사업)이 실시되었다. 이를 통해 당시 쓰시마의 화전경작에 해를 주던 [[멧돼지]]들이 쓰시마에서 절멸되었다.<ref name=cho94>長(1981)p.94</ref>
 
이후 소 씨는 [[개역]](改易) 한 번 당하는 일 없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때까지 단절되는 일 없이 이어졌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백작]](伯爵)으로써 [[화족]](華族)의 반열에 올랐다. [[14세기]] 후반부터 에도 시대에 이르기까지 쓰시마 소 씨는 일관되게 일본의 중앙권력에 복속되어 있으면서도 중세에 이르러 조선 왕조의 관직을 받기도 하는 등 특수한 위치에 있었다. 일본의 사학자 다카하시 기미아키(高橋公明)는 이러한 쓰시마의 위치에 대해 「쓰시마의 경계성」(対馬の境界性)이라 표현하고 있다.<ref>高橋(2001)</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