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회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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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지식사회학 ===
[[파일:Pitirim Sorokin.jpg|thumb섬네일|160px|오른쪽|피티림 소로킨(1917년)]]
{{본문|지식사회학}}
과학이 사회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 지에 대한 연구는 [[:en:Sociology of Knowledge|지식사회학]]의 일부분으로서 19세기 말부터 다뤄졌다. 이 분야의 선구자인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물질적인 발전이 개인의 사회적·정치적·지적 생활을 결정한다는 유물론적 사고를 주창하였다.<ref>Karl Marx, ''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1904, pp.11-12</ref> 이들은 자연과학의 지식이 다른 학문과는 달리 경제적 요소의 영향을 받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연과학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상공업의 발전과 같은 경제적 요인이 작용하며<ref>Karl Marx & Fredrich Engels, ''The German Ideology'', pp.36</ref><ref>Fredrich Engels, ''Socialism:Utopian and Scientific'', 1910, pp.24-25</ref> 지배계급은 자신을 보호하고 타인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연과학과 기술들을 이용한다고 보았다<ref>Karl Marx, ''Capital'', vol.1 pp.47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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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능주의 ===
{{본문|기능주의(사회학)|}}
[[파일:Spencer1.jpg|thumb섬네일|160px|오른쪽|허버트 스펜서]]
19세기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는 생물체가 내부 기관들의 상호작용 덕분에 삶을 유지하며 외부 환경에 맞춰 진화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인간 사회도 생물체와 비슷한 양상을 보일 것이라 생각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기능주의를 정립하였다. 기능주의는 사회를 규범·관습·전통·제도의 4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한 체계로 규정한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각각의 요소들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며, 만약 구성원 중 일부에 변화가 생기거나 외부로부터 충격이 가해지면 다른 요소들이 발맞추어 변화함으로써 사회는 새로운 질서를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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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과학사 연구 ====
{{부분 토막글}}
[[파일:GodfreyKneller-IsaacNewton-1689.jpg‎|thumb섬네일|160px|오른쪽|아이작 뉴턴(1689년)]]
17세기 전반에 걸쳐 영국과학은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자연철학자 [[로버트 보일]]을 비롯하여 식물학자 [[:en:John Ray|존 레이]]· 동물학자 [[:en:Francis Willughby|프랜시스 윌러바이]]·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 같은 뛰어난 학자들이 출현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1660년에는 영국 국왕 [[찰스 2세]]의 지원 하에 과학자들의 학술단체인 [[왕립학회]]가 설립되었다.<ref>로버트 K. 머턴(석현호 외 옮김), 앞의 책, 440쪽</ref><ref>[http://royalsociety.org/about-us/history/|영국 왕립학회의 역사 소개(영문)]{{깨진 링크|url=http://royalsociety.org/about-us/history/%7C%EC%98%81%EA%B5%AD }} 왕립학회는 1660년부터 활동하였으며, 정식으로 국왕의 인가를 받은 것은 1662년이었다. (2011년 11월 21일 확인)</ref> 특히 왕립학회는 1665년부터 세계 최초의 학술지 중 하나인 《철학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를 발행함으로써 학자들이 체계적으로 교류할 수 있도록 도왔다.<ref>[http://rstl.royalsocietypublishing.org/|철학회보의 역사 소개(영문)]{{깨진 링크|url=http://rstl.royalsocietypublishing.org/%7C%EC%B2%A0%ED%95%99%ED%9A%8C%EB%B3%B4%EC%9D%98 }}(2011년 11월 21일 확인)</ref> 과학발전이 당시 영국의 사회적 배경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리라 생각한 머턴은 이를 주제로 학위연구로 진행하였으며, 1938년에는 논문 《17세기 영국의 과학, 기술과 사회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in Seventeenth-Century England''》을 발표한다.<ref>로버트 K. 머턴(석현호 외 옮김), 앞의 책, 352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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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턴은 1942년 논문 《과학의 규범구조》를 통하여 "연구자들이 규범을 따름으로써 과학의 가치를 실현한다고 주장하였지만,<ref>로버트 K. 머턴(석현호 외 옮김),앞의 책, 502-521쪽</ref> 이것만으로 과학을 설명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규범구조는 사회체계로서의 과학을 서술하였을 뿐, 과학자들이 규범을 따르게 되는 원동력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ref>로버트 K. 머턴(석현호 외 옮김), 앞의 책, 31-32쪽</ref> 머턴은 과학자들이 규범을 따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중복 발견과 우선권 분쟁에 관한 역사적 사례들에서 해답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으며, 이후 과학자 공동체의 보상체계가 과학자들의 연구동기를 강화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ref>로버트 K. 머턴(석현호 외 옮김), 앞의 책, 32-33쪽</ref>
=== 중복 발견과 우선권 분쟁 ===
[[파일:Gottfried Wilhelm von Leibniz.jpg|thumb섬네일|160px|right|미적분학의 창시자 자리를 두고 뉴턴과 대립한 라이프니츠]]
[[파일:Galileo.arp.300pix.jpg|thumb섬네일|160px|right|자신의 업적을 보호하는데 힘쓴 갈릴레오]]
 
과학 분야에서는 직접· 간접적 교류가 없는 학자들이 동일한 연구를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이러한 현상은 중복 발견이라 불리며, 많은 역사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관심대상이었다.<ref>로버트 K. 머턴(석현호 외 옮김), 앞의 책, 674-682쪽</ref> 예를 들어 19세기 영국의 역사학자 [[:en:Thomas Babington Macaulay, 1st Baron Macaulay|토마스 매콜리]]는 미적분학을 독자적으로 발견한 영국의 [[아이작 뉴턴|뉴턴]]과 독일의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라이프니츠]]를 연구한 후,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미적분학을 개발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였다. 즉, 뉴턴이나 라이프니츠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미적분학을 비슷한 시기에 개발했으리라는 것이다.<ref>Thomas Macaulay, ''Miscellaneous Wokrs of Lord Macaulay'', 1880, New York: Harper, vol.1</ref> 이와 비슷하게 20세기 미국의 사회학자 [[:en:William F. Ogburn|윌리엄 오그번]]과 [[:en:Dorothy S. Thomas|도로시 토마스]]는 지식이 축적되고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연구자들은 어쩔 수 없이 특정한 문제들에 주목하게 된다고 언급하였다. <ref>William F. Ogburn & Dorothy S. Thomas, "Are Inventions Inevitable", ''Political Science Quarterly'' vol.37 pp.83-98</ref> 머턴은 좀 더 나아가서 "과학적 성과는 원칙적으로 중복 발견이며, 표면적으로는 단독 발견처럼 생각되는 것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논거로 제시한다.<ref>로버트 K. 머턴(석현호 외 옮김), 앞의 책, 683쪽</ref> 그는 중복 발견을 여러가지 형태로 분류하기도 하였는데, 미발표 연구를 나중에 다른 학자가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경우· 논문이 발표되기는 하였지만 묻혀있다가 다른 사람의 연구로 빛을 보는 경우· 거의 같은 시기에 중복 발견이 이뤄져서 모두가 논문을 발표하거나 한 쪽이 소식을 미리 듣고 포기하는 경우 등 다양하다.<ref>로버트 K. 머턴(석현호 외 옮김), 앞의 책, 685-694쪽</ref>
 
과학자들 역시 다른 누군가가 자신과 비슷한 주제로 연구를 하고 있으며, 언제든지 발표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에는 과학자들 간에 오간 서신이 있는데, 17세기 영국의 과학자 [[에드먼드 핼리]]는 아이작 뉴턴과 [[:en:John Flamsteed|존 플램스티드]]에게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빨리 발표하라고 독촉하였으며 19세기 식물학자 [[:en:Charles Lyell|찰스 라이엘]]은 [[찰스 다윈]]에게 자연선택설에 관한 그의 논문을 발표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먼저 논문을 발표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ref>로버트 K. 머턴(석현호 외 옮김), 앞의 책, 695쪽</ref>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은 누가 먼저 과학적 발견에 대한 우선권을 놓고 분쟁하였다. 미적분학의 창시자라는 명예를 두고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말년에 치열하게 싸운 예는 아주 대표적이며, [[갈릴레오 갈릴레이|갈릴레오]]는 몇몇 사람을 '자신으로부터 업적을 빼앗아가려는 협잡꾼'으로 몰아세우기도 하였다. 19세기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제너]] 역시 [[종두법]] 개발과 관련하여 우선권 분쟁을 겪었다.<ref>로버트 K. 머턴(석현호 외 옮김), 앞의 책, 545-54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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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의 소통구조 ===
1950년대 후반, [[:en:Herbert Menzel|허버트 멘젤]] 등이 과학자들의 의사소통 방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머턴의 과학사회학과 무관하게 진행하였지만, 의사소통이 새로운 학문을 형성하는데 중요함을 알게 되면서 두 연구분야는 융합하였다. 이 분야의 대표적 저서는 [[:en:Diana Crane|다이애나 크레인]]의 《보이지 않는 대학 ''Invisible College''》과 [[:en:Nicholas C. Mullins|니콜라스 멀린스]]의 논문 《생물학자들 간의 사회적 연결망 ''Social Networks Among Biological Scientists''》등이 있다. <ref>로버트 K. 머턴(석현호 외 옮김), 앞의 책, 38-39쪽</ref> 그 외에도 [[:en:Joseph Ben-David|요셉 벤다비드]]나 독일의 학자들도 새로운 연구분야가 형성되는 과정을 연구하였다.<ref>[http://plato.stanford.edu/entries/scientific-progress/|Scientific Progress(Stanford Encylcopedia of Philosophy)]{{깨진 링크|url=http://plato.stanford.edu/entries/scientific-progress/%7CScientific }} 중 "1.The Study of Scientific Change의 마지막 문단 (2011년 11월 26일 확인)</ref> 그러나 제시된 모형의 대부분은 학자들이 연구의 소재로 삼은 사례에 대해서만 맞아떨어졌다. 예를 들어 영국의 사회학자 [[:en:Mike Mulkay|마이클 멀케이]]와 데이비드 엣지는 저서 《천문학의 재탄생 (과학, 문화와 사회) ''Astronomy Transformed (Science, Culture & Society)''》에서 전파천문학의 발전과정이 기존에 제시된 모형들과 맞지 않음을 보였다. 최근에는 신생 연구분야의 탄생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하고 일반적인 이론은 없다는 견해가 대세를 차지한다.<ref>과학학의 이해(Science studies : An advanced introduction), David J. Hess 지음, 김환석 옮김, 2004, 당대, 146-147쪽</ref>
* 벤다비드-콜린스의 모형
기성 학문은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쉽지 않다. 이를 걱정한 일부 연구자들은 경쟁이 덜하며 지위를 쉽게 확보할 수 있는 분야로 전공을 바꾸는데, 이 때 기존에 갖고 있던 지식과 방법론을 새로운 전공과 접목한다. 역할 혼성화(Role-hybridization)이라 불리는 이 과정을 통하여, 기존의 학문과는 다른 새로운 연구분야가 만들어진다. 모형이 잘 적용되는 사례로는 19세기 중반에 독일 생리학자 [[:en:Wilhelm Wundt|빌헬름 분트]]가 창시한 [[:en:Experimental psychology|실험적 심리학]]을 들 수 있다. 그는 인간의 심리라는 철학적 주제에 생리학적 실험방법을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연구분야를 만들었다.<ref>Joseph Ben-David & Randall Collins, "Social Factors in the Origins of a New Science: The Case of Psychology.",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31(4) pp.451-465</ref><ref>[http://plato.stanford.edu/entries/wilhelm-wundt/|Wilhelm Maximilian Wundt(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깨진 링크|url=http://plato.stanford.edu/entries/wilhelm-wundt/%7CWilhelm }} 중에서 "3.Experimental psychology : object and method" (2011년 11월 26일 확인)</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