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틀 이름 및 스타일 정리
1번째 줄:
'''김원치'''([[1943년]] ~ [[2008년]])는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 출신으로,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서울지방검찰청]] 1차장, [[서울고등검찰청]] 차장, [[대한민국 대검찰청|대검찰청]] 감찰부장·형사부장 등을 지냈다. '[[공안]] 검사의 대명사'라는 별칭이 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대한민국 사회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공안 역사'의 상징적 인물이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1952437 김원치 전 검사장 사망]. 한겨레. 2008년 5월 22일.</ref> <ref>박세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1980115 김근태의 '비밀병기' 인재근 "2012년을 점령하겠다"]. 프레시안. 기사입력 2012년 1월 22일. 최종수정 2012년 1월 25일.</ref> <ref>최상명.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02&aid=0001996821 김근태의 몸, 한국민주투쟁사의 기록]. 프레시안. 2013년 12월 30일.</ref>
 
== 생애 ==
[[1943년]] [[제주특별자치도|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오현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였다. [[제주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한 바 있고 이 때 배우 [[고두심]]이 제자였다. [[1971년]] 치러진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598329 (검찰 간부 38명 人事) '검사장급이상 법무부.검찰간부 명단']. 한국경제. 2003년 3월 11일.</ref>
 
'[[공안]] 검사의 대명사'라는 별칭이 있다. 격동의 시절인 [[1980년대]]와 [[1990년대]]의 대한민국 사회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이름이 등장하는 공안 역사의 산 증인이다. "검사가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무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신조 아래 [[서울고등검찰청]] 차장과 [[대한민국 대검찰청|대검찰청]] 형사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28년 동안 [[대한민국 검찰청|검찰청]]에서 근무하였다.<ref>신동명·석진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8&aid=0000012081 (검찰)김원치 씨 고문수사 묵인 논란]. 한겨레. 2003년 3월 14일.</ref> <ref>이승욱·김영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26927 최용석 "김원치 검사 지시로 고문 당했다", 김원치 "나를 죽이려는 음해다"]. 오마이뉴스. 2003년 3월 14일.</ref> <ref name="유지">유지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1954361 (부고) ‘공안 검사 대명사’ 김원치 변호사]. 서울신문. 2008년 5월 23일.</ref>
 
[[2003년]] 2월에 [[노무현 정부]] 출범하였고 판사 출신 변호사 [[강금실]]이 제55대 [[대한민국 법무부|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노무현 정부|참여정부]]는 검찰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에 대해 대검찰청 형사부장 김원치는 '검찰개혁은 검찰의 자율적 개혁에 맡기는 게 원칙'이라는 주장을 하고 참여정부의 인사가 '기수·서열 파괴'라고 비난하며 검찰 내부 통신망에 검찰 인사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글을 게시하였다. 이에 대해 1980년대 학생운동권 주역들은 김원치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성명서를 냈다. 2003년 [[3월 26일]] 김원치는 법무부에 사표를 제출하였고 이후 변호사 생활을 하였다.<ref>남호철·송세영.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140761 (검찰간부 인사 배경과 특징) 안정 속 ‘서열파괴’]. 국민일보. 2003년 3월 11일.</ref> <ref>김형기.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012212 김원치 대검형사부장 사표]. 경향신문. 2003년 3월 26일.</ref> <ref>석진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11963 (검찰)386세대 “김원치 검사장 과거 잘못부터 사죄를]. 한겨레. 2003년 3월 13일.</ref> <ref>김종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1&aid=0000022768 공안검사와 피고인 `사이버재회`]. 문화일보. 2003년 3월 11일.</ref>
 
2003년 3월에 자전적 에세이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2008년 4월에 자전적 에세이 《법과 인생》을 펴냈다. [[2008년]] 5월 [[간경변]]으로 사망하였다. <ref>이영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0143540 “양치기 소년 된 검찰…불신 덜어지길”…김원치 前검사장 에세이집 펴내]. 국민일보. 2003년 4월 2일.</ref> <ref name="유지"/>
 
==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