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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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황존소는 [[동림학파|동림당]]원으로, 황종희가 소년 시절에 [[환관]] [[위충현]]의 모진 탄압으로 인하여 옥사하였다. 이와 같은 환경은 명말, 극도의 정치불안 속에서 그의 사상과 행동에 일찍부터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띠게 하였다. 청년시대, 소동림(小東林)으로 불리는 문학적 결사인 ‘복사(復社)’에 참가하고 정의한으로서의 면목을 발휘하였다. [[이자성]]의 반란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청군이 침입하자, 그는 향리의 자제들을 규합하여 항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에도 반청(反淸) 지하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청조]]의 중국 지배가 확립되고 명조 부활의 희망이 없어지자 그는 향리로 돌아가서 학자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는 [[강희제]]가 전대의 명조 유신을 회유 우대하기 위하여 [[1678년]]([[강희]] 17년)에 행한 박학홍유(博學鴻儒)로 추거(推擧)함을 거절했으며, 또한 동년 명사관(明史館)의 초빙에도 응하지 않은 채 절조를 지켜 이민족 왕조에 벼슬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청조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자식이나 제자가 청조의 관리가 되는 것을 말리지 않는 등 한결 유화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호안국]](胡安國)의 후예 학파를 자처한 그는 결국 부친의 유언에 따라 [[유종주]](劉宗周)를 스승으로 삼아, [[양명학]]의 전통을 승계하였으나 공리공론을 배제하며 객관적 사실을 중히 여겼다. 또한 사학에도 전심하여 경학사학(經學史學)의 겸수(兼修)에 의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풍을 개발하여 청조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는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명유학안》(明儒學案), 《송원학안》(宋元學案), 《역학상수론》(易學象數論) 등이 있고, 그가 이룬 ‘절동학파’(浙東學派, 절강(浙江)의 동(東)에서 나온 학파라는 뜻)에서 [[만사동]](萬斯同), [[전조망]](全祖望), [[장학성]](章學誠) 등의 우수한 사학자가 나왔다.
 
==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