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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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
=== 취임과 사정 작업 ===
[[1993년]] [[2월 25일]] 문민정부는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주자유당]]의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의 대통령 취임과 함께 출범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3170_6127.html 김영삼 대통령 취임, 함께 신한국으로]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3170_6127.html |date=20160305014205 }} 1993.2.25 mbc뉴스데스크</ref> 김영삼 정부는 군부 출신의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의 최초의 정부라는 의미로 문민정부로 불리게 되었다. [[삼당합당]]의 결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개혁과 부패 일신 정책을 펼쳤다.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해산,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앴고,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의 전직 대통령들을 구속 수감시켰다. 김영삼은 강력한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개혁의 칼"을 들어 정치·경제·사회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일시에 쇄신하고자 했다.<ref name="한415">김용욱, 《한국정치론》 (오름, 2006) 415페이지</ref>
 
[[2월 27일]], 김영삼은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전격 공개했고 공개한 본인의 재산을 보면 김영삼과 부인 손명순 여사는 상도동 자택과 거제군 장목리 전답, 승용차, 헬스클럽 회원권, 선박 등 모두 6억 8천 601만 3410원의 재산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3241_6127.html 김영삼 대통령, 재산 공개. 국무위원 재산공개 권유]{{깨진 링크|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3241_6127.html }} 1993.2.27 mbc뉴스데스크</ref> 그리고 김영삼은 이것이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종용했고, 삼부요인과 고위 공무원들이 연이어 재산을 공개하게 되었다.<ref name="vs1">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4:미완성의 민주화》 (한길사 | 2006) 409페이지</ref>
 
[[3월 13일]], 김영삼은 [[일본군 위안부|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물질적 보상을 일본측에 요구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히고 그에 대한 보상은 내년부터 정부예산으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3752_6127.html 김영삼 대통령, 종군위안부 문제 정부예산으로 보상]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3752_6127.html |date=20160305010756 }} mbc뉴스데스크 1993-03-13</ref> 이어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는 "[[일본]]측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며 물질적 보상문제는 필요하지 않다"면서 그런점에서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새로운 한·일 관계 정립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최근 국민들이 변화와 개혁에 대해 큰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어 그때그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지만 너무 혁명적인 인상은 주지 않도록 속도를 조정하도록 하라"고 부처에 지시하였다.[[5월 13일]] 5·13특별 담화에서 그는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했다. 그 뒤 반공주의 극우 세력의 반발이 심화되자 [[5.18]]과 [[12.12]] 군사반란 및 [[전두환]] [[노태우]]에 대한 처벌문제에 대해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라고 발언하여 결말을 뒤로 미루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5264_6127.html 김영삼 대통령, 광주 민주화항쟁 관련 특별담화문 발표]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5264_6127.html |date=20140201211421 }} 1993.5.13 mbc뉴스데스크</ref>
 
1995년 [[6월 3일]]에는 전국연합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 전국 36개 단체가 모여 부당한 공권력 반대와 노동인권 보장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를 열었으며 시민, 학생 등 1만여명,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김영삼 대통령 망언 규탄 및 노동인권 보장 촉구 국민대회"를 갖고 노동탄압을 즉각 중지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기도 하였다.<ref>[http://www.demos.or.kr/ilji/viewbody.html?code=agenda&page=3&number=4798&keyfield=event&key=%B1%E8%BF%B5%BB%EF 김영삼 대통령 망언 규탄 및 노동인권 보장 촉구 국민대회] {{웨이백|url=http://www.demos.or.kr/ilji/viewbody.html?code=agenda&page=3&number=4798&keyfield=event&key=%B1%E8%BF%B5%BB%EF# |date=20021030175405 }} 성공회대학교 사이버NGO자료관 1995-06-03</ref> [[6월 22일]]에는 경제부총리 [[이경식 (1933년)|이경식]]을 불러 [[금융실명제]]를 빨리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7월]] [[율곡비리]] 사건을 조사하여 비리 관련자들을 처벌하였다.[[8월 12일]]에는 긴급명령을 발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통해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을 통해 해야 한다는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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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8월 2일]], [[행정안전부|총무처]] 장관 [[서석재]]가 전임 대통령 중 1인이 4천억 이상의 비자금과 가명계좌를 보유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고 [[전두환]]·[[노태우]]의 해명을 요구하여 화제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신군부 인사의 혐의에 대해 반란죄,내란죄를 따지지 않고 신군부 인사들을 불기소 처분하였다. 같은 해 [[10월 19일]]에는 민주당 [[박계동]] 의원의 폭로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사건을 폭로된 이후 제5공화국 인사를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수사를 명하였다. [[11월 24일]] 김영삼은 대통령 명령으로 5·18 관련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였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1,1,list1,24.html 김영삼대통령의 5.18 특별법 제정 지시 의미] 1995.11.24 mbc뉴스데스크</ref>
 
헌법재판소에 검찰의 5.18 사건 불기소 처분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1995년 11월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가 구속되었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1,1,list1,16.html 노태우 씨 구속 집행 표정] 1995.11.16 mbc뉴스데스크</ref> 12월 3일에는 전두환이 구속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2,1,list1,3.html 전두환 구속 수감 첫날] 1995.12.3 mbc 뉴스데스크</ref> 12월 19일 [[5.18 특별법]]이 국회에서 제정되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2,1,list1,19.html 여야 3당,5.18 특별법 합의] 1995.12.19 mbc뉴스데스크</ref> 이와 함께 신군부 인사들의 새로운 혐의가 밝혀지자 검찰은 1995년 12월, 12.12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검찰은 5.18 사건 공소시효 만료 하루 전인 [[1996년]] [[1월 23일]] 전두환과 노태우등 관련자 8명을 구속 기소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1,1,list1,23.html]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1,1,list1,23.html |date=20160305012416 }} 1996.1.23 mbc뉴스데스크</ref> 김영삼은 군정과의 관계를 끊고자 1996년 2월, [[민주자유당]]의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꾸고 첫 전당대회를 열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2,1,list1,6.html]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2,1,list1,6.html |date=20150402102811 }} 1996.2.6 mbc뉴스데스크</ref>
 
[[전두환]]과 [[노태우]]는 1996년 8월, 각각 사형(전두환)과 징역 22년형(노태우)을 선고받았으나<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8,1,list1,26.html]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8,1,list1,26.html |date=20160305012805 }} 1996.8.26 mbc뉴스데스크</ref> 96년 12월,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전두환)과 징역 17년형으로 감형됐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12,1,list1,16.html]{{깨진 링크|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12,1,list1,16.html }} 1996.12.13 mbc뉴스데스크</ref> 그 이듬해인 1997년 12월 20일, 대통령 김영삼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관련자를 모두 특별사면하여 석방함으로써 두 전직 대통령은 구속 2년여 만에 출옥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170066&categoryId=200000317</ref><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2,1,list1,20.html] 1997.12.20 mbc뉴스데스크</ref> 사면 당시 많은 논란이 있었고 당시 김영삼의 청와대는 김대중 당선자(12월 18일 대통령당선)에게 방문하여 제안하여 협의로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시켰다고 전해졌다.<ref>[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2221_6187.html 국민 대화합 첫 단추] 1997.12.20 mbc뉴스데스크</ref>
1996년 8월, 연세대에서 터진 [[한총련]] 사태로 1200여명의 전경, 학생들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10053_6172.html 범청학련 시위로 경찰과 학생 모두 1200여명 부상]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10053_6172.html |date=20150402091157 }} 1996.8.16 mbc뉴스데스크</ref> 1996년 12월 26일, 집권당인 신한국당은 안기부법과 노동법 날치기통과로 노동계와 정계에 엄청난 반발을 샀고<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12,1,list1,26.html]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12,1,list1,26.html |date=20131203091211 }} 1996.12.26 mbc뉴스데스크</ref> 이듬해 1월, 노동법파동으로 정국은 큰 혼란에 빠졌다.
 
=== 집권 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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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5일]] [[대한민국]]이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제통화기금]]에 자금지원을 신청하며 경제 정책의 실패를 자인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경제가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국제통화기금]]에서 요구하는 조건들을 수행해야 했으며 경기 악화로 인해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여당이던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은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권교체가 되었다. 12월 18일에는 [[국민회의]] [[김대중]]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2,1,list1,19.html] 1997.12.19 mb뉴스데스크</ref>
 
[[1997년]] 12월, [[국가안전기획부]]([[대한민국 국가정보원|국가정보원]])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 겸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정치 공작을 자행하였는데, [[1998년]] [[3월]] 국가 안전 기획부와 검찰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이 사건을 당시 국가 안전 기획부 부장이었던 [[권영해]]가 주도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3월 18일]], 검찰 소환을 받은 권영해는 조사중에 자해하는 소동을 빚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8/1978163_6202.html 권영해 전 안기부장 성경에 숨긴 칼로 자해] 1998.3.18 mbc뉴스데스크</ref> 권영해 부장 후임으로 1998년 3월 취임한 [[이종찬 (1936년)|이종찬]] 안기부장은 안기부에 대한 사정 작업과 정치 중립화 작업을 진행하였으며, [[1999년]] 국가 정보원으로 명칭도 변경하였으나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불법 전화 도청 등의 행태는 계속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줬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5/1920401_6307.html 국가정보원, 김대중 정부까지 해 왔다고 밝혀]{{깨진 링크|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5/1920401_6307.html }} 2005.8.6 mbc뉴스데스크</ref>
 
[[1997년]] [[12월 20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 사건은 대법원 최종 판결이 난 지 8개월여 만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두 사람에 대한 사면을 합의, 발표했고 이로써 비자금 사건은 종결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127004 <`10년째 미완' 노태우 비자금 사건>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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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 ==
문민정부는 이른바 '신외교'를 표방하였다. [[1996년]] 12월 프랑스 파리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본부에서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다. 1996년 10월에는 '선진국 클럽'인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 [[프랑스]] [[파리 (도시)|파리]]에 있는 OECD 본부에서 대한민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OECD 회원국이 되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10,1,list1,11.html]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10,1,list1,11.html |date=20150402135219 }} 1996.10.11 mbc뉴스데스크</ref>
 
=== 남북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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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정부는 대외적인 여론을 주시하며 국내의 김일성 참배여론을 원천봉쇄했으나 [[전남대학교]]에서는 김일성분향소를 만들어 250여명의 학생들이 조문하는 사태가 벌어졌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4/1933566_6142.html 전남대 학생회관, 김일성 분향소 발견] 1994.7.15 mbc뉴스데스크</ref> 구 군사정권 관계자들이 [[김일성]] 빈소 조문 사건을 문제삼아 재기의 조짐이 보이자, 김영삼 정부는 일부 주동 대학생들을 처벌하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토록 하였다.
 
[[1995년]] [[6월 25일]] 정부는 북측에 대한 식량 지원(쌀 15만톤 규모)을 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06,1,list1,25.html] 1995.6.25 mbc뉴스데스크</ref> 1996년 여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의한 원자로 건설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1996년]] 9월 18일, 북측 무장 간첩단이 잠수함을 타고 [[강원도]] [[강릉]]에 침투하여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경색된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9,1,list1,18.html]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09,1,list1,18.html |date=20090818033035 }} 1996.9.18 mbc뉴스데스크</ref> 1997년 2월, [[황장엽]] [[조선로동당]] 총비서가 남한으로 망명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02,1,list1,12.html] 1997.2.12 mbc뉴스데스크</ref> 7월 10일, 망명한 황장엽은 기자회견을 통해 당시 북측의 전쟁준비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07,1,list1,10.html] 1997.7.10 mbc뉴스데스크</ref> 같은시기 [[김정일]]의 처조카였던 이한영씨가 분당의 자택에서 괴한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져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경색되었다.<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02,1,list1,16.html] 1997.2.16 mbc뉴스데스크</ref>
 
=== 한미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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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
1995년 8월, 교육부는 [[초등학교|국민학교]]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변경하게 하였다. 1996년부터 모든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개명하게 된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81200329101005&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5-08-12&officeId=00032&pageNo=1&printNo=15508&publishType=00010 국민학교 명칭 바뀐다] 1995.8.12 경향신문</ref> 이 당시에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일제의 쇠말뚝 뽑기운동이 일어났으며,<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21600209101004&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02-16&officeId=00020&pageNo=1&printNo=22771&publishType=00010 일제 쇠말뚝 제거 정부 지원] 1995.2.16 동아일보</ref> 구 [[조선총독부]] 철거 작업을 실시, 같은해 [[8월 15일]]부터 조선총독부 철거작업에 들어갔으며<ref>[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958083_6157.html 광복 50주년 중앙 경축식,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철거]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5/1958083_6157.html |date=20151123001018 }} 1995.8.15 mbc뉴스데스크</ref> 총독부는 1996년 11월에 완전 철거되었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122700209112015&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12-27&officeId=00020&pageNo=12&printNo=23408&publishType=00010&doNotReadAnyMore=notClose 구 총독부 건물 완전철거] 1996.12.27 동아일보</ref>
 
* [[1993년]] 지존파 일당 7명이 5명을 연쇄 살인한 사건([[지존파 사건]]), 이들 중 6명의 사형이 1995년에 집행되었다. 전남 목포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사고|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참사]], 전북 부안군 [[서해페리호 침몰사고]], [[1993년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사고|구포역 열차 전복]], [[우암상가 아파트 붕괴사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 확산 금지 조약 탈퇴를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