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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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성기 ===
삼국통일한반도 남부 통합 이후 신라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데 무열왕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신문왕 때에는 김흠돌의 모역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들에 대한 숙청을 가하였다. 이 후,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화백|화백회의]]를 주도하여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으며, 녹읍을 폐지하고 수조권만을 인정한 관료전(官僚田)이 지급하는 등 신문왕은 진골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5묘제를 설치하여, 태종무열왕계의 정통성을 강화하였다.<ref><한국의 전통예술> ( 한국문화재 보호재단 편집부 저 ) 304p</ref> 이 후 685년에 사지(舍知)를 설치하여 영(令)·경(卿)·대사(大舍)·사지(舍知)·사(史)의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하였으며, 같은 해에 지방제도인 9주 5소경제를 확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