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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당의 사정==
===민주정의당===
보수대연합의 기원은 1986년 [[5·3 인천 사태]] 때로 돌아간다. 당시 학생 운동권의 주도로 열린 민주화 촉구 데모에서 급진적인 단체들이 반미·용공 성향의 주장들을 내놓아 반공 문화가 강하던 한국 사회에 충격을 안겨주고 있었다.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호의적이었으나 체질적으로 보수 정당이던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까지도 이를 규탄하고 나섰는데, 마침 강경 야당 신민당의 존재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민정당은 급진 좌파 세력을 막기 위해 보수 정당들이 힘을 합쳐야만 한다며 신한민주당에 보수대연합을 위한 당대당 통합을 제의했다. 민정당의 보수대연합 제의는 이후로도 꾸준히 지속됐으나, 김영삼·김대중·김종필 등 보수 야권의 리더들은 민정당이 직선제 개헌 이후 사라질 정당이라고 판단한 데다, 딱히 진보 진영이 정치 세력화를 구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던 탓에 호응을 얻지 못했다.
민정당은 [[1988년]] [[대한민국 제13대 총선|13대 총선]]을 앞두고 27명의 현역 국회의원을 지역구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강수를 두며 과반수 의석 확보에 전력투구했지만, 5공 청산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열망이 민정당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호남]] 지역의 전멸을 비롯해 125석(지역구 87석, 전국구 38석)에 그쳤고, 이 후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안 부결 및 [[국정감사]] 부활 등 야당에게 정국주도권을 빼앗기면서 고전하고 있었다.
 
민정당은 [[1988년]] [[대한민국 제13대 총선국회의원 선거|13대제13대 총선총선거]]을 앞두고 27명의 현역 국회의원을 지역구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강수를 두며 과반수 의석 확보에 전력투구했지만, 5공 청산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열망이 민정당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호남]] 지역의지역에서 전멸을전멸한 비롯해것은 물론 전국적으로 125석(지역구 87석, 전국구 38석)을 얻는 데 그쳤고, 이 후 [[정기승]] [[대법원대한민국의 대법원장|대법원장]] 임명안 부결 및 [[국정감사]] 부활 등 야당에게 정국주도권을 빼앗기면서 고전하고 있었다.
이에 당시 민정당 총재였던 [[노태우]] 대통령은 제1 야당인 [[평화민주당]]과 합당하여 국회 과반수 의석도 확보하고, 호남 지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우군으로 만듦으로써 호남 지역의 민심을 얻는 일석이조의 구상을 하였다. 이후 [[김원기 (1937년)|김원기]] 당시 평민당 원내총무를 통해 5.18 문제 해결에 대한 전권을 주겠다는 구실로 김대중 총재에게 은밀하게 합당을 제의했으나, 김대중 총재가 끝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통일민주당과 보수성향의 신민주공화당에 합당제의를 하게 되었다.
 
이에 민정당은 1986년 때부터 주장해오던 보수 정당 대통합을 재추진하기로 했다. 특히 민정당은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과 합당하여 과반 의석도 확보하고, 호남 지역에서의 지지 기반도 마련하는 안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민정당은 [[김원기 (1937년)|김원기]] 당시 평민당 원내총무를 통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5·18]] 문제 해결에 대한 전권을 주겠다며 합당을 제의했으나, 평민당이 끝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대신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에 합당 제의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 통일민주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