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오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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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차 십자군 ===
[[파일:Godefroy de Bouillon.jpg|섬네일|250px|left|[[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부용의 고드프루아|고드프루아 드 부용]]을 접견하는 알렉시오스 1세.]]
1090년경 알렉시오스는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교회의 대분열]] 이후 소원하던 [[로마 가톨릭|서방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하였다. [[교황 우르바노 2세]]와의 교섭을 통해 서방의 군대를 끌어들여 아나톨리아에서 잃어버린 제국의 영토를 되찾을 계획을 세우고 교황의 지지를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호소했다. [[1095년]] [[교황]]은 [[피아젠차]]에서 [[프랑스]]의 [[클레르몽 공의회|클레르몽]]으로 여행하며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고 대(對)[[무슬림]] 전투에 참가하는 자들은 죄를 방면해주겠다고 선동하였다. 이 호소에 힘입어 서방의 [[왕]]들과 [[주교]], [[기사 (군사)|기사]]들은 대군을 조직하고 준비하였는데 이는 알렉시오스가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 알렉시오스는 서방의 무법자들이 제국을 거쳐 성지로 원정을 떠나는데 제국이 입을 피해를 걱정하였다. [[은자 피에르]]를 위시한 어중이떠중이로 구성된 [[군중 십자군]]을 시작으로 서방에서 십자군이 제국의 영토로 몰려왔고 알렉시오스는 늘상 이들의 뒤치닥거리로 바빴다. 비록 서방의 야만스러운 무법자들이 제국을 엉망으로 만들기는 하였지만, 알렉시오스의 현명한 대처로 그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소아시아로 건너가서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알렉시오스는 이들에게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했다. [[니케아]]와 몇몇 소아시아 [[도시]]들이 다시 제국의 수중에 떨어졌다. 십자군은 [[팔레스타인]]에서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두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으나 나중에 거의 대부분 서약을 깨고 알렉시오스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안티오키아]] 같은 유서깊은 제국의 도시가 영토가 오만한 [[노르만족]]인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타란토의 보에몽]]의 수중에 넘어갔고 보에몽은 [[안티오크 공국]]을 세웠다. 다른 십자군 장군들도 제국을 적대시하였다. 알렉시오스는 서부 [[아나톨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일부 회복했고, 또한 보에몽을 견제해 타우루스 남동부 지방으로 진출해 아다나와 타르수스 주변의 비옥한 해안 평야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아울러 [[시리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멀리 진군했다. 그러나 십자군이 세운 작은 [[십자군 국가]]들에 대해 영구적인 통제권을 확립할 수 없었고, [[1107년]] 보에몽이 그리스 서부의 아블로나를 침공했을때 이에 맞서 힘겹게 싸워야 했다. 이때부터 수십 년간 노르만인들은 비잔티움의 최대 적수가 된다.
 
=== 내정과 말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