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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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구는 1127년 임안(현재 [[항저우]])에서 즉위하여 [[남송 고종|고종]](高宗)이 되었고, 송나라를 재흥했다. 처음엔 [[악비]](岳飛)등의 활약으로 인해 금나라에게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진회]](秦檜)가 재상으로 취임하면서 주전론(主戰論)자들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평을 맺고, [[악비]]는 살해되었다. [[진회]]의 사후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海陵王)이 침공을 개시했으나, 금나라의 황족 완안옹(完顔雍)이 [[해릉왕]]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해릉왕]]은 죽고 완안옹은 금나라의 [[금 세종]](世宗)이 되어 송나라와 화평을 맺었다. 같은 해 고종은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양자인 조신(趙慎)이 즉위하여 [[남송 효종|효종]](孝宗)이 되었다.
 
효종시대 송나라와 금나라의 관계는 안정되어 평화가 찾아왔다. 효종은 불필요한 관리의 숫자를 줄이고, 당시 남발기미가 보이던 회자(會子;지폐)의 절제 및 농촌의 체력회복, 강남경제의 활성화등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해 남송은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추진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1189년]] 퇴위하여 상황이 되고, 조돈(趙惇)이 즉위하여 [[송 광종|광종]](光宗)이 되었으나, [[한탁주]](韓侂冑) 등에 의해 광종은 퇴위당하고 반대파의 대량 탄압을 일으켰다([[경원의 당금]](慶元之党禁). 이 시기 [[주희]](朱熹)의 [[주자학]](朱子學;당시 도학(道學)이라고 불렸다)도 거짓학문이라고 탄압받았다(경원위학의 금(慶元偽學之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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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탁주]]는 금나라가 [[타타르]] 등의 침입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북벌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1207년]] 금나라의 요청으로 [[한탁주]]는 살해되고, 그의 머리는 소금에 절여져 금나라로 보내지는 것으로 금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1233년]] [[몽골 제국]]이 금나라의 수도 개봉([[카이펑]])을 함락하자, 남쪽으로 도망친 금나라 최후의 황제 [[애종]](哀宗)을 송나라군과 협력하여 사로잡아 [[1234년]] 금나라는 멸망했다.
 
그 후 송나라군은 북상하여 [[낙양]](洛陽)과 카이펑을 회복하였으나, 이것은 몽골과의 조약위반이 되었기에 몽골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투는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쿠빌라이]]가 [[양양 (후베이 성)|양양]](襄陽)을 함락하면서 남송은 더이상의 저항할 힘이 없어져 [[1276년]] 몽골의 장군 [[바린의 바얀|바얀]]에 의해 수도 임안이 점령되면서 사실상 송나라는 [[섹스국]]멸망했다. 남쪽으로 도망쳐 철저항전을 계속했던 일부 황족, 관료, 군인들도 [[1279년]] 광주만(廣州灣)의 애산(厓山)에서 원나라군에게 함락당하고 격멸당해 이것으로 인해 송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한족(漢族)들은 몽골족에 대항하면 처형되고 노비가 되었고 몽골족을 지배자로 받아들인 한족(漢族)들은 흡수되어 송나라는 원나라에 완전히 흡수되었다.([[애산 전투]]).
 
== 사회,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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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기술 ===
송나라 때에는 경제발달과 함께 각종 실용기술도 소수 발전하여 방위자석이 발명되었다. 또 화약, 인쇄기술도 본격적으로 운용되어 사회 각 방면에서 이용되었다. 제지, 인쇄기술의 향상과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이 독점하던 문학, 사상 등이 시민들 사이에도 퍼져나가게 되었다.
 
=== 송나라 역대황제 가계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