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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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명나라가 망하자 명나라의 부흥을 선언하고, 남쪽으로 가서 남명을 세웠다. 그러나 정치적인 능력은 감국겸 시중으로 추대된 노왕이나 계왕 보다도 무능했는데, 단지 황족 생존자 중 서열이 높고, 연령이 고령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부흥군은 그를 황제로 인정한 것이다. 이어 [[숭정제]]에게 의종이라 시호를 추서하고 그의 아들인 자살한 황태자 [[주자랑]]에게도 도황제라는 시호를 추서하였으며, 아버지 주상순에게도 공종(恭宗) 공황제(恭皇帝), 정순숙철성경인의공황제(貞純肅哲聖敬仁毅恭皇帝)로 추존하고 능호는 희릉(熙陵)이라 하였다. 뒤에 아버지의 시호를 개시하여 공황제(共皇帝)로 했다가 다시 개시하여 정순숙철성경인의효황제(貞純肅哲聖敬仁懿孝皇帝)로 했다가 다시 모천수도정순숙철수문현무성경인의효황제(慕天敷道貞純肅哲修文顯武聖敬仁毅孝皇帝)라 하였다.
 
그러나 부흥군은 그를 [[유비]]의 아들 후주 유선과 비슷하게 취급하고 무시했다고 한다.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 [[동림당]]은 황제와 훈신들 탓만 하였으나 홍광제는 피난조정에서 조차 당쟁을 일삼는 [[동림당]]원들 역시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1645년 청나라 정벌군과의 교전 중 패주하다 [[청나라]]로 투항한 황득공의 부하 장군 전유승(田維乘)과 마득공 등에게 체포되어 연경으로 압송, 모반죄로 감금당했다가감금되었다가 [[1646년]] [[5월 23일]] 참수형당하였다참수되었다. 정달의 야사무문에 의하면 '전유승과 마득공은 그를 통나무에 묶어서 끌고갔는데 그는 울면서 살려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무시당하였다. 화가 난 그는 전웅의 목을 깨물어서 피가 흘렀으나 무용지물이었다' 한다. 그의 사후 연락이 두절되어 각지에 흩어진 [[명나라]] 부흥군은 두 명의 황제가 난립하는 등 혼란에 빠졌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