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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고려 개국 ===
본관은 [[평산 신씨|평산]](平山) 초명은 [[능산]](能山)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춘천 출신이며 체격이 장대하고 용맹이 있었다고 한다.
초명은 [[삼능산]](三能山)이다. 후에 [[고려 태조|태조]] 왕건으로부터 평산을 관향으로 하사받고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된다. [[918년]]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협력하여 [[왕건]]의 집에 가서 “폭군을 폐위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청컨대 공은 [[은]](殷)과 [[주나라|주]](周)의 옛일을 본받아 실행하셔야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왕으로 추대하였다.
[[태봉]](泰封) 말기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기병대장으로 [[궁예]](弓裔)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918년]]에 [[고려]]를 개국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대장군이 되었다.
 
“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왕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라면서 [[왕건]]이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삼능산|신숭겸]]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라고 밝혀 자신들의 거사가 천명임을 강변하였다. 결국 거사를 [[왕건]]이 허락하자 그를 [[고려]]의 [[고려 태조|태조]]로 세웠다.
[[927년]] ([[고려 태조|태조]]太祖 10년) [[견훤]](甄萱)이 이끄는 [[후백제]]군과 공산(公山) 지금의 경북 달성군 팔공산 동수(桐藪)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대장군(大將君)으로 군사(君史)를 이끌고 참여했다. [[견훤]](甄萱)의 [[군대]](君大)가 [[고려 태조|태조]](太祖)를 포위하여 형세가 매우 위급해지자 원보 김락(金樂)과 더불어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그 덕분에 [[고려 태조|태조]](太祖)는 간신히 피신했다. [[고려 태조|태조]](太祖)는 그의 동생 능길(能吉) 아들 보를 원윤(元尹)으로 등용하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하여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
 
=== 전사 ===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927년]]([[고려 태조|왕건]] 10) [[음력 9월]] [[공산 동수 전투]]에서 [[김락]], 전이갑, 전의갑 형제와 함께 [[고려 태조|왕건]]을 구하고 전사하였다. 공산 전투 초반 [[고려]]군이 승리하는 것 같았으나 싸움의 진행 중 [[고려 태조|태조]]는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위험하였다.
 
이때 [[삼능산|신숭겸]]이 "제가 대왕과 외모가 비슷하오니 제가 대왕으로 변장하면 대왕께서는 무사히 탈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왕건]]과 옷을 바꾸어 입고 [[고려 태조|왕건]]이 일반 군졸로 변장하여 포위를 뚫고 탈출하였다.
[[고려 태조|태조]](太祖) 즉위 후 7년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後百濟)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新羅)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新羅)를 공격해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태조]](太祖)는 크게 분개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고려 태조|태조]](太祖)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태조 왕건]]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삼능산|신숭겸]]은 [[고려 태조|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고려 태조|태조]] [[왕건]]이 무사히 빠져나간 이후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후백제]]군은 그의 시신에서 수급을 베어갔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고려 태조|태조]](太祖)는 [[삼능산|신숭겸]](申崇謙)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년]]([[고려 성종|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고려 태조|태조]](太祖)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삼능산|신숭겸]](申崇謙)의 행적을 기록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는 [[1120년]] [[고려 예종|예종]](睿宗)이 [[삼능산|신숭겸]](申崇謙)과 [[김락]]을 추도하며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가 전한다.
 
이후 [[삼능산|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고려 태조|왕건]]은 크게 슬퍼하여 [[개성직할시|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삼능산|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사후 ===
또한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을 원윤으로 삼았고, 지묘사(智妙寺)를 새로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대구광역시|대구]]에는 아직도 파군재, 독좌암, 왕산, 안심, 해안, 반야월, 백안, 연경, 살내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의 격전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강원도]] [[춘천시]]에는 [[삼능산|신숭겸]] 장군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에는 묘와 묘비, 신도비, 사당, 영정, 동상이 있고, 묘에는 봉분이 세 개가 있어 특이한 형태로 되었다.
 
[[1805년]]에 [[김조순]]이 비문을 짓고, 신위가 글씨를 쓴 신도비에 의하면 봉분이 3개가 있는데 대하여 두가지설이 있으니 그 하나는 [[삼능산|신숭겸]]이 전사하자 [[견훤]]의 [[후백제]]군들이 목을 베어 갔으므로 [[고려 태조]]는 순금으로 두상(頭像)을 만들어 시신과 같이 매장하고 어느 것에 시신이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하여 도굴을 방지하려 하였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삼능산|신숭겸]]의 부인 묘라고 전해지는데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고 기록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7&aid=0000080152 강원문화순례(13)장절공 신숭겸장군묘역]</ref>
 
한편 일찍이 [[삼능산|숭겸]]이 [[고려 태조|태조]]를 따라 삼탄에 사냥을 나갔을 때에 마침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나는 것을 보고 [[고려 태조|태조]]가 말하는 대로 셋째 놈의 왼쪽 날개를 쏘아 맞췄다.
 
[[고려 태조|태조]]가 크게 칭찬하고 평주(平州 : 평산)라는 본관을 주고 기러기를 쏜 근방의 밭 3백 결(結)을 주어 자손 대대로 조(租)를 받게 하였으니, 이 땅을 궁위(弓位)라 불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