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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사 ===
[[927년]]([[고려 태조|태조 (太祖)]] 10) [[음력 9월]] [[공산 동수 전투]]에서 [[김락]](金樂), 전이갑, 전의갑 형제와 함께 [[고려 태조|태조]]을 구하고 전사하였다. 공산 전투 초반 [[고려]]군이 승리하는 것 같았으나 싸움의 진행 중 [[고려 태조|태조]]는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위험하였다.
 
이때 [[삼능산|신숭겸]]이 "제가 대왕과 외모가 비슷하오니 제가 대왕으로 변장하면 대왕께서는 무사히 탈출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왕건]]과 옷을 바꾸어 입고 [[고려 태조|왕건]]이 일반 군졸로 변장하여 포위를 뚫고 탈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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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이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동안 [[삼능산|신숭겸]]은 [[고려 태조|왕건]]의 행세를 하며 [[왕건]]의 백마를 타고 [[군대]]를 통솔하다가 [[고려 태조|태조]] [[왕건]]이 무사히 빠져나간 이후 [[견훤]]군에게 발견 [[견훤]]군이 쏜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후백제]]군은 그의 시신에서 수급을 베어갔다.
 
이후 [[삼능산|신숭겸]](申崇謙)의 시체를 발견한 [[고려 태조|왕건태조]](太祖)은 크게 슬퍼하여 [[개성직할시|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삼능산|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끼워 넣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사후 ===
또한 그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을보장(甫藏)을 원윤으로 삼았고, 지묘사(智妙寺)를 새로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대구광역시|대구]]에는 아직도 파군재, 독좌암, 왕산, 안심, 해안, 반야월, 백안, 연경, 살내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 있어, 당시의 격전지임을 알 수 있다.
 
현재 [[강원도]] [[춘천시]]에는 [[삼능산|신숭겸]] 장군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에는 묘와 묘비, 신도비, 사당, 영정, 동상이 있고, 묘에는 봉분이 세 개가 있어 특이한 형태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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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에 [[김조순]]이 비문을 짓고, 신위가 글씨를 쓴 신도비에 의하면 봉분이 3개가 있는데 대하여 두가지설이 있으니 그 하나는 [[삼능산|신숭겸]]이 전사하자 [[견훤]]의 [[후백제]]군들이 목을 베어 갔으므로 [[고려 태조]]는 순금으로 두상(頭像)을 만들어 시신과 같이 매장하고 어느 것에 시신이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하여 도굴을 방지하려 하였다고 하고, 다른 하나는 [[삼능산|신숭겸]]의 부인 묘라고 전해지는데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고 기록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7&aid=0000080152 강원문화순례(13)장절공 신숭겸장군묘역]</ref>
 
한편 일찍이 [[삼능산|숭겸]](崇謙)이 [[고려 태조|태조]]를 따라 삼탄에 사냥을 나갔을 때에 마침 세 마리의 기러기가 나는 것을 보고 [[고려 태조|태조]]가 말하는 대로 셋째 놈의 왼쪽 날개를 쏘아 맞췄다.
 
[[고려 태조|태조]]가 크게 칭찬하고 평주(平州 : 평산)라는 본관을 주고 기러기를 쏜 근방의 밭 3백 결(結)을 주어 자손 대대로 조(租)를 받게 하였으니, 이 땅을 궁위(弓位)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