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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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승한 후, 박정희는 정권 유지에 불안을 느끼고 보다 안정적인 집권을 꾀하기 위해 [[대한민국 헌법 제8호|유신 헌법을헌법]]을 선포한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208312145125|제목=유신헌법은 무엇이었나… 초헌법적 긴급조치, 삼권분립 부정, 세계사적 ‘헌정 파괴’|날짜=2012-08-31|언어=ko|확인날짜=2018-10-09}}</ref>
 
유신 헌법은 대통령과 [[광역선거구|전국구]] 국회의원 선출, 개헌 및 통일 정책 의결 등의 권한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관에 부여하고, 국민회의는 선거로 구성하도록 규정했다.
 
10월 17일 비상조치로 국회와 정당을 해산시키고 야당의 입을 막은 상태에서 유신 헌법은 결국 통과를 보게 되었고, 이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서둘러 이뤄지게 되었다.
 
== 결과 ==
주로 관변 단체 인사들이나 지역 유지들이 출마해 당선된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70.4%의 투표율을 기록했으며, 총 2,359명의 대의원을 선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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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지역별 결과<ref>{{웹 인용|url=http://elecinfo.nec.go.kr/neweps/1/1/wonmunDataView.do?toc_en=Y&author_nm=%25C1%25DF%25BE%25D3%25BC%25B1%25B0%25C5%25B0%25FC%25B8%25AE%25C0%25A7%25BF%25F8%25C8%25B8&publish_nm=%25C1%25DF%25BE%25D3%25BC%25B1%25B0%25C5%25B0%25FC%25B8%25AE%25C0%25A7%25BF%25F8%25C8%25B8&publish_ymd=1973&epid=MON0120060569&open_yn=&open_type=&open_comment=&contentId=2F6570646174612F455030362F4D4F4E323030362F30312F4D4F4E303132303036303536392F4D4F4E303132303036303536395F30303031532E706466&ctl_no_id=MON0120060569&epdata_id=MON0103&tocPath=/epdata/EP06/MON2006/01/MON0120060569/MON0120060569.toc&svc_path_nm=/epdata/EP06/MON2006/01/MON0120060569&start_file_sn=0001&total_qy=515&data_nm=%25C5%25EB%25C0%25CF%25C1%25D6%25C3%25BC%25B1%25B9%25B9%25CE%25C8%25B8%25C0%25C7%25B4%25EB%25C0%25C7%25BF%25F8%25BC%25B1%25B0%25C5%25BB%25F3%25C8%25B2|제목=선거정보도서관|언어=ko|확인날짜=2018-10-0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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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제8대 대통령과 1·2기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 제1차 회의: 제8대 대통령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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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국회의 개원을 앞둔 1973년 3월 5일, 박정희 대통령은 제1기 간선 의원 후보 73명, 예비후보 14명 등을 일괄 추천하였다. 간선 의원은 재적 대의원 과반의 출석과 출석 대의원 과반의 찬성으로 당선이 확정된다는 규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973년 3월 7일 제2차 집회에서 명단 전체에 대한 찬반 투표를 진행해 통과시켰다.<ref>{{웹 인용|url=https://news.joins.com/article/1342315|제목=통일주체국민회의선출. 의원후보73명공고. 박대통령일괄추천으로 국민회의사무처서|성=지면보기|이름=입력 1973 03 05 00:00 종합 1면|날짜=1973-03-05|웹사이트=|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19-04-04}}</ref><ref>{{뉴스 인용|url=https://news.joins.com/article/1342517|제목=중앙일보|성=|이름=|날짜=1973년 3월 7일|뉴스=대통령추천 73명 의원선출 지역별 국민회의 찬2,251 반82 무효21표|출판사=|확인날짜=2018년 10월 9일}}</ref> 제2차 회의는 시도별 지역 회의 형식으로 개최되었다.
 
투표에는 재적 대의원 2,359명 중 2,354명이 참여해 99.8%의 투표율을 기록했는데, 불참자는 해외 체류 중이던 서울의 서정귀, ·남궁연 대의원, 부산의 이재헌 대의원, 경북의 정타용 대의원 등 4명과 와병 중이던 전남의 정병용 대의원 등 5명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5명이었다.<ref>{{웹 인용|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30700329201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3-07&officeId=00032&pageNo=1&printNo=8442&publishType=00020|제목=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확인날짜=2019-04-18}}</ref> 대통령재적 추천대의원의 국회의원과반의 선출은지지가 재적필요한 대의원이대통령 아닌선거와 재석달리, 대의원의간선 의원 선거는 재적 대의원 과반의 찬성으로출석과 이루어지므로,출석 재적대의원 대의원은과반의 2찬성이 필요했음으로,359명이었지만 재석 대의원선거에는 수인출석자 2,354명의 과반인 과반인 1,178표가 필요했다.
 
국민회의는 95.6%의 압도적인 찬성율로 박정희 대통령이 추천한 국회의원 후보들을 승인하였으며, 이때 당선된 간선 의원들은 3월 10일 유신정우회라는[[유신정우회]]라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고결성하고 12일 제9대 국회의 개원과 동시에 취임하였으며, 앞서 2월 27일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박정희 정부의 여당으로 활동했다. 간선 의원 당선자 73명 중 [[김종필]] 전 총리를 포함한 29명은 민주공화당 당적 보유자였으나, 당선 후 유정회 가입을 위해 탈당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3080020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3-08&officeId=00020&pageNo=1&printNo=15824&publishType=00020|제목=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확인날짜=2019-05-1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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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차 회의: 제2기 간선제 국회의원 선거 ===
제2차 회의 때와 마찬가지로역시 지역별로 소집된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3차 회의는, 제1기 간선 의원들의 임기가 1976년 3월 11일 종료됨에 따라 후임 간선 의원들을 선출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2월 14일 국민회의에 제2기 유신정우회유정회 의원 후보 73명과 예비후보 5명의 명단을 제출했는데, 그 중 50명은 기존 1기 의원들이 그대로 재추천됐고 나머지 23명은 새로운 인물들이었다.<ref>{{웹 인용|url=https://news.joins.com/article/1429326|제목=유정회 2기 의원 새 후보는 23명|성=지면보기|이름=입력 1976 02 14 00:00 종합 1면|날짜=1976-02-14|웹사이트=|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19-04-04}}</ref>
 
대의원들은 1976년 2월 16일 역시 시도별로 모여 제3차 회의를 개최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추천한 제2기 의원들의 당선을 확정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joins.com/article/1429406|제목=유정회 2기 의원 73명 당선확정|날짜=1976-02-16|뉴스=중앙일보|언어=ko-KR|확인날짜=2018-10-09}}</ref> 대의원 14명은 불참했는데, 서울의 남궁연, 경기의 김춘, 전북의 조상래 등 3명은 해외 체류로, [[임영신]] 등 11명은 병으로 불참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21600329201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2-16&officeId=00032&pageNo=1&printNo=9349&publishType=00020|제목=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확인날짜=2019-04-18}}</ref>
 
재적 대의원은 대의원의 사망, 사퇴 등으로 2,303명으로 줄었으나, 2,000명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그대로 둔다는 규정 탓에 보궐 선거가 행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중 2,289명의 대의원들이 출석하여 통과에 필요한 대의원 수는 1,145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