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연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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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기 위해 [[예산 가야사지|가야사]]를 불태웠다. 고종은 그 덕택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하여 가야산에 [[보덕사]](報德寺)를 세웠다.<ref>[[이순익]](李淳翼)이 찬(撰)한 흥선대원군묘지명(墓誌銘)에 의한다고 {{서적 인용 |저자=[[김명호]] |제목=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 |초판연도=2005 |출판사=역사비평사 |쪽=252 }}에서 인용.</ref>[[1866년]]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묘소를 도굴]]하여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욱 악화시키기도 했다. 묘소는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기념물 제80호 《[[남연군의묘]]》로 지정되었다. 사후 [[조선 순조|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첫 시호는 영희(榮僖)였고 뒤에 고종 때 가서 시호가 개정되어 [[1864년]](고종 1) [[7월 9일]] 충정(忠正)의 시호가 내려졌다.
 
손자 [[대한제국 고종|명복]]이 고종으로 즉위하면서, [[1864년]](고종 1년) [[의정부]][[영의정]] [[조두순 (1796년)|조두순]] 등의 발의로 [[불천지위]]에 올랐다. 비석과 신도비는 손자 고종이 즉위한 후인 [[1865년]] [[5월]]에 세워졌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던 [[김병학]]이 짓고, 비석의 글씨는 종정경을 겸하던 아들 [[흥인군]]이 썼으며, 그의 손자인 [[이재원 (1831년)|이재원]]이 새겼다. [[1868년]](고종 5) [[5월 10일]] 저녁, 통상 수교 요청을 거절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독일]]인 오페르트에 의해 묘가 도굴 당하려 했으나 봉분 아래에 큰 무쇠에 도끼가 튀어 실패하였다. 그러나 남연군묘 도굴 미수사건은 서양인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감정을 자극하여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