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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 ===
[[충청남도]] [[청양군]] 출생인 최양업은 아버지 [[최경환 (종교인)|최경환]]([[프란치스코]])와 어머니 [[이성례]]([[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마리아]]) [[1839년]] [[기해박해]] 때 모두 여의었다. 천주교 성지인 충북 [[제천시|제천]] [[배론성지]]에는 최양업 신부를 기념한 그림이 있는데, 경기도 [[수리산]]에 살던 중에 검거되어 최경환은 옥사, 이성례는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어머니 이성례는 막내아들이 [[감옥]]에서 아들인 [[스테파노]]가 [[굶주림]]끝에 죽자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철회하여 석방되었다. 하지만 아들이 천주교 [[신학교|신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수감되자 용기를 내어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이때 [[조선]]에 남아있던 최양업의 동생 [[야고보]]가 동생들과 거지꼴을 면하지 못했음에도 엄마를 돌보았는데, [[참수형]] 전날에는 동냥하여 가져온 돈을 사형집행인에게 주고,고통을 덜 받게 단칼에 엄마의 목이 떨어지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인 [[최한일]]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탄압을 받았으므로 오랫동안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으며, 자주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최종적으로 최양업의 집은 당시 경기도 [[과천군]] [[수리산]] 자락에 자리잡게 되었다.
=== 유학 ===
[[1836년]] 열다섯 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소속의 [[선교사]]인 [[피에르 모방|모방]] 신부의 천거로 [[김대건]], [[최방제]] 등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이듬해 1837년 [[6월 7일]]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피에르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비교적 가까운 북경신학교나 중국인 신부양성소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까지 가서 유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ref>{{저널 인용 |저자=박해진 |날짜=1994 |제목=역사탐방 : 민족혼의 제단에 바친 밀알 - 김대건과 민영환 - |url=http://kiss.kstudy.com/journal/thesis_name.asp?tname=kiss2002&key=1776811 |저널=도시문제 |출판사=대한지방행정공제회 |권=29 |호=302 |doi= |쪽=128|확인날짜=2016-02-13|인용문=조선에서 가까운 北京에 유학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마카오까지 가게 된 데는 모방신부의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방신부는 처음부터 北京신학교나 중국인 신부양성소를 그렇게 탐탁스럽게 여지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말해 [[가톨릭]]정통의 맥을 이어받지 못하고 어딘가 世俗化된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ref> [[1837년]] [[11월 26일]] 친구 [[최방제]]가 풍토병(위열병)으로 숨을 거두자, 김대건과 최양업은 신학 공부에 더욱 몰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