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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급제 ===
{{참고|임오군란}}
[[1882년]], 25세 나이로 [[조선의 과거 제도|증광문과]](增廣文科) 별시에 병과(丙科) 18위(전체 28위 해당)로 급제한 후, 주서(注書-정7품)가 됐다. 증광시(增廣試)는 왕실에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만 치러는치르는 과거시험이었는데 이완용이 시험 보았던 당시 축하할 일이란 청나라 개입으로 [[임오군란]]을 진압하고서 [[충주]]까지 피난갔던 [[명성황후]]를 청군의 경호속에 무사 환궁시키고, 반대로 대원군이 [[톈진 시|중국 톈진]]에 끌려가면서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부부(夫婦)]]가 다시 조정 실권을 차지한 일을 가리킨다.
 
갑과(甲科)나 을과(乙科) 급제도 아니고 그보다 급이 낮은 병과(丙科)에서조차 1등이 아닌데도 이례적으로 정7품으로 임명됐는데<ref group="*">갑과나 을과 급제자는 보통 6, 7품, 병과급제자는 8품이나 9품으로 임명되는 것이 상례였다. 갑과 급제자는 승진이 빠르고 각종 청요직(淸要職)을 거치며 고관대작(高官大爵)이 될 수 있었다.</ref>, 이는 이완용의 후견인이었던 아비 이호준이 발 빠르게 대원군과 손을 끊고 이미 민씨 정권과 손을 잡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ref group="*">실례로 이완용과 과거 급제 동기인 [[서재필]]은 이완용보다 과거 성적도 더 높았고 최연소 합격자였음에도 집안이 받쳐주질 못해 약 3개월여를 임관도 못한채 대기 상태에 있어야 했다.</ref>. 이후 이호준과 함께 [[수구당|수구파]]로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하기까지 [[양무 운동]]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