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관왕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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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정유재란]] 때 조선 땅에서 싸운 [[명나라]] 장수들은 [[관우]]의 신령을 보는 체험을 하고 곳곳에 [[관왕묘]]를 세웠다. 보고를 받은 명나라는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을조선에 도와준관왕묘를 명나라의지으라는 요청으로요청을 하였고, 이에 [[동대문]] 밖에 관왕묘를1599년 지었다.공사를 1599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시작하여 [[1601년]](선조 34년) 동관왕묘를 완공하였다. [[명나라]] [[명 신종|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였다.
 
벽은 돌과 진흙으로 구성되어 있고 9,315m²로 되어 있다. 동관왕묘의 중심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정(丁)' 자 모양과 '일(一)'자 모양이 합쳐진 '공(工)'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전실과 본실을 감싼 벽돌의 바깥에는 다시 기둥을 두어 처마를 받치고 있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 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넓은 벽돌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