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호앙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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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응우옌호앙주'''({{vie|v=Nguyễn Hoằng Dụ|hn=阮弘裕|eum=완홍유}}, ? ~ 1518년)는 대월 후 레 왕조의 대신, 장수이다. == 생애 == 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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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3년]], 응우옌반랑이 병사하자 찐주이산이 단독으로 병권을 장악하였다.
 
[[1516년]], [[쩐까오 (陳暠후 레 왕조)|쩐까오]]가 반란을 일으켜 [[하노이|탕롱]]을 공격했다. 응우옌호앙주는 명을 받들어 이를 토벌하러 나갔으나 보제영(菩提營)에 주둔한 채 진격하지 않았다. 한편, 찐주이산은 오랫동안 양익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쩐까오의 난을 틈타 양익제를 죽이고 [[레꽝찌]]를 옹립하였다. 이에 응우옌호앙주는 찐주이산이 임금을 시해한 죄를 토벌한다고 하며 탕롱으로 군사를 돌렸다. [[찐주이다이]]는 레꽝찌를 협박하여 데리고 청화로 달아났고, 찐주이산은 따로 [[레 소종]]을 옹립하였다. 쩐까오는 이 혼란을 틈타 탕롱을 공격해 취하니 레 소종은 청화에서 쩐까오를 토벌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찐주이산은 천관(天關)에서, 응우옌호앙주는 장안(長安), 위인(莅仁)에서 진격하였고, 평부후(平富侯) 응우옌반르(阮文慮)와 영흥후(永興侯) [[찐뚜이]]도 수군과 보군을 거느리고 병진하여 탕롱을 포위 공격했다. 한 차례 격렬한 전투를 치른 뒤 탕롱은 수복되었다.
 
찐주이산은 쩐까오의 잔당을 토벌하다가 전사하였는데, 이때 응우옌호앙주는 찐뚜이와 함께 탕롱을 진수하고 있었다. 응우옌호앙주는 동하방(東河坊)에 주둔하였고, 찐뚜이는 대라성(大羅城) 바깥에 주둔하였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응우옌호앙주는 병을 칭하고 입조하지 않았다. 레 소종이 [[염파]]와 [[인상여]]의 고사를 들어 화해할 것을 권했으나, 둘 다 듣지 않았다. 응우옌반르와 찐주이다이가 함께 입궁하여 그들을 위해 화해를 주청하였는데, 찐주이다이가 찐뚜이와 함께 모반하였다는 응우옌반르의 무함에 걸려 소종에게 참수당했다. 이에 응우옌호앙주는 거병하여 찐뚜이를 공격하였고, 양 군은 탕롱의 영창(永昌), 곡포(曲浦), 복고(復古) 등의 방(坊)에서 교전하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고, 탕롱은 잔파되었다. 마침내 찐뚜이가 패배하여 청화로 달아났다. 철산백(鐵山伯) [[쩐쩐]]이 이 소식을 듣고 탕롱으로 출병하여 응우옌호앙주를 공격했다. 응우옌호앙주는 패배하여 청화로 달아났다. 쩐쩐은 산남(山南)을 지키고 있는 무천백(武川伯) [[막당중]]에게 병사를 내어 응우옌호앙주의 도주로를 차단하고 공격할 것을 권하였으나, 막당중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응우옌호앙주는 도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