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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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
마지막까지 진나라에 항거한 초나라 명장 [[항연]]의 손자로 조부가 죽고 [[초 (춘추 전국)|초나라]]가 멸망하자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회계의 오중으로 숨어, 숙부 항량의 손에 자랐다. [[진승]](陳勝), [[오광]](吳廣)의 난이 일어나고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숙부 항량과 함께 봉기하여 회계군수 은통을 참살한 뒤, 8천여 군사를 이끌고 차례로 주변 세력을 병합한 뒤 숙부 항량을 따라서 초나라를 재건하고 진나라 군대와 싸운다. 이 과정에서 양성을 어렵게 함락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항우는 양성의 군인과 거주민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그뒤로는 [[전한 고제|패공 유방]]과 같이 별동대를 이끌고 성양(城陽)을 함락시킨걸을 시작으로 복양(濮陽) 정도(定陶), 옹구(雍丘), 외황(外黃)등을 돌며 진군을 격파한다. 그러나 이과정에서 성양에서 또 학살을 저질러 잔혹한 모습을 보인다.<ref name=":0">{{서적 인용|url=|제목=[[사기 (역사서)|사기]] 항우본기|성=사마천|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이후 [[초 의제|초왕 미심]]의 발언을 보면 양성과 성양외에도 자주 학살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항우과 패공과[[전한 고제|패공 유방]]이 같이 외황을 떠나 진류를 공격하던 중 숙부 항량의 본대가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의 역습으로 정도에서 대패하고 항량 본인은 전사한다. 항량의 본대가 패배하자 항우와 패공은 여신(呂臣)의 군대와 합류해 진류에서 동쪽 팽성으로 퇴각한다. 초왕은[[초 의제|초왕 미심]]은 항량의 패배를 수습하면서 항우를 장안후(長安侯)로 임명하고 노공이라는 호칭을 준다<ref>{{서적 인용|url=|제목=[[사기 (역사서)|사기]] 고조본기|성=[[사마천]]|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항우가 팽성에 주둔하던 중 장한의 진나라 군이 조나라를 공격해 수도 거록성을 포위하고 용도(甬道)라는 도로를 만들어 보급로를 구축하자 [[초 의제|초왕 미심]]은 조나라를 돕기로돕고 하고이번기회에 항량이진나라의 정도에서 패배할 것을 예견해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던 송의를 상장군으로 임명하고 항우작위를 준 뒤 송의의중심부인 부하인관중으로 차장으로진격하기로 임명한다결정한다. 송의가이때 이끄는초나라 조나라장수들은 구원군은진나라의 안양지역에서강한 멈춘뒤기세에 46일간관중공격을 움직이지반대하고 않았다.오직 이에항우만이 항우는항량의 상관복수를 송의에게위해 행군을[[전한 서둘러고제|패공]]과 줄것을같이 부탁했지만관중에 송의는들어가기를 이를 묵살한다원했다. 여기에그러나 보급품까지[[초 부족한의제|초왕 상황에서미심]]과 송의가여려 아들의신하들은 송별잔치를항우가 크게저질렀던 열어준학살 일로때문에 항우를항우가 비롯한학살로 부하장수들의적을 불만이늘릴 극에상황을 달했고우려했고 항우는때문에 밤을온화했다고 틈타 송의를 살해한다. 이후 군사들에게는 초왕의 명령으로 송의를 처형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여러 장수들도 이에 호응해 항우를 임시 상장군으로 추대하고,알려진 [[전한 의제고제|초왕패공 미심유방]] 어쩔항우대신 관중으로 없이보내고 항우를대신 상장군으로항우는 인정한다.<ref조나라 name=":0"구원군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항우과 패공과 같이 외황을 떠나 진류를 공격하던 중 숙부 항량의 본대가 장한이 이끄는 진나라 군의 역습으로 정도에서 대패하고 항량 본인은 전사한다. 항량의 본대가 패배하자 항우와 패공은 여신(呂臣)의 군대와 합류해 진류에서 동쪽 팽성으로 퇴각한다. 초왕은 항량의 패배를 수습하면서 항우를 장안후(長安侯)로 임명하고 노공이라는 호칭을 준다<ref>{{서적 인용|url=|제목=[[사기 (역사서)|사기]] 고조본기|성=[[사마천]]|이름=|날짜=|출판사=|확인날짜=}}</ref>. 항우가 팽성에 주둔하던 중 장한의 진나라 군이 조나라를 공격해 수도 거록성을 포위하고 용도(甬道)라는 도로를 만들어 보급로를 구축하자 [[초 의제|초왕 미심]]은 조나라를 돕기로 하고 항량이 정도에서 패배할 것을 예견해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던 송의를 상장군으로 임명하고 항우작위를 준 뒤 송의의 부하인 차장으로 임명한다. 송의가 이끄는 조나라 구원군은 안양지역에서 멈춘뒤 46일간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항우는 상관 송의에게 행군을 서둘러 줄것을 부탁했지만 송의는 이를 묵살한다. 여기에 보급품까지 부족한 상황에서 송의가 아들의 송별잔치를 크게 열어준 일로 항우를 비롯한 부하장수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항우는 밤을 틈타 송의를 살해한다. 이후 군사들에게는 초왕의 명령으로 송의를 처형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여러 장수들도 이에 호응해 항우를 임시 상장군으로 추대하고, [[초 의제|초왕 미심]]도 어쩔 수 없이 항우를 상장군으로 인정한다.<ref name=":0" />
 
=== 거록대전과 진나라 멸망 ===
항우는 [[초 의제|초왕 미심]]의 지시에 따라 조나라 구원군으로 참전, 과거 항량이 정도에서 패배할 것을 예견해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아 상장군으로 임명된 송의의 부하인 차장으로 임명한다. 송의가 이끄는 조나라 구원군은 안양지역에서 멈춘뒤 46일간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항우는 상관 송의에게 행군을 서둘러 줄것을 부탁했지만 송의는 이를 묵살한다. 여기에 보급품까지 부족한 상황에서 송의가 아들의 송별잔치를 크게 열어준 일로 항우를 비롯한 부하장수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항우는 밤을 틈타 송의를 살해한다. 이후 군사들에게는 초왕의 명령으로 송의를 처형했다고 거짓말을 했고 여러 장수들도 이에 호응해 항우를 임시 상장군으로 추대한다. [[초 의제|초왕 미심]]도 어쩔 수 없이 항우를 상장군으로 인정한다.<ref name=":0" />
상장군이 된 항우는 당양군과 포장군에게 병졸 2만을 별동대로 주어 거록을 급하게 돕게하고, 그뒤 본대를 이끌고 장하강을 건넌다. 장하강을 건넌 항우와 군사들은 사흘 양식만 준비한 뒤 솥과 천막을 타고온 배까지 모두 부숴버려 빠르게 승리할 것을 각오한다. 그 뒤 항우는 보급도로인 용도와 거록성을 포위한 진나라군을 공격해 9번 싸워 모두 승리하고 진나라 장수 소각(蘇角), 섭리는 죽이고 왕리는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둔다([[거록 대전]]) 이 승리로 다른 제후군도 항우를 섬기게 된다. 거록 대전 이후 항우는 퇴각한 장한의 군대를 추격해 극원지역에서 대치한다. 장한은 항우의 계속되는 공격과, 진나라 조정과의 불화, 진여의 설득등으로 저항할 의지를 잃어갔고 결국 후시성(侯始成)을 보내 항우와 항복협상을 한다. 항우도 거록대전 직전 보급품을 모두 부서버린 일로 군량이 부족해 싸움에 어려움이 있었고 장한의 항복을 받아들인다. 항우는 은허(殷虛) 지역에서 장한의 항복의식을 받은 뒤 장한을 옹왕으로 임명하고 같이 항복한 사마흔을 상장군으로 임명한다.(작성중)
 
상장군이 된 항우는 당양군과 포장군에게 병졸 2만을 별동대로 주어 거록을 급하게 돕게하고, 그뒤 본대를 이끌고 장하강을 건넌다. 장하강을 건넌 항우와 군사들은 사흘 양식만 준비한 뒤 솥과 천막을 타고온 배까지 모두 부숴버려 빠르게 승리할 것을 각오한다. 그 뒤 항우는 보급도로인 용도와 거록성을 포위한 진나라군을 공격해 9번 싸워 모두 승리하고 진나라 장수 소각(蘇角), 섭리는 죽이고 왕리는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둔다([[거록 대전]]) 이 승리로 다른 제후군도 항우를 섬기게 된다. 거록 대전 이후 항우는 퇴각한 장한의 군대를 추격해 극원지역에서 대치한다. 장한은 항우의 계속되는 공격과, 진나라 조정과의 불화, 진여의 설득등으로 저항할 의지를 잃어갔고 결국 후시성(侯始成)을 보내 항우와 항복협상을 한다. 여러번의 교전과 협상을 이어간 끝에 항우도 거록대전 직전 보급품을 모두 부서버린 일로 군량이 부족해 싸움에 어려움이 있었고있어 장한의 항복을 받아들인다. 음력 7월 항우는 은허(殷虛) 지역에서 장한의 항복의식을 받은 뒤 진나라 항복군 20만명을 받아들이고 장한을 옹왕으로 임명하고 같이 항복한 사마흔을 상장군으로 임명한다임명해 항복한 진나라 군을 맡긴다. 거록대전 후 항우는 관중정벌을 위해 서쪽 함곡관으로 진군하던 중 초나라 병사들이 과거의 원한때문에 항복한 진나라 군대를 핍박하는 일이 벌어지고 일부 진나라 병사들이 불만과 혹시나 패배하면 관중의 가족들에게 있을 피해를 걱정하는 등 불만의 목소리가 생겨나자 항우는 이런 불만을 자신에 대한 반항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음력 11월 신안지역에 진군하자 항우는 경포와 포장군을 시켜 밤에 진나라 군대의 주둔지를 습격 장한, 사마흔, 동예를 제외한 진나라 군사 20만을 신안성 남쪽에 생매장 해버린다.(작성중[[신안대학살]])
 
죽자 격분하여 스스로 상장군이라 칭한 뒤 [[하북]](河北)에서 [[장한]](章邯)을 항복시키고 도처에서 진나라군을 무찔러 진의 세력을 소탕하였다. 허나 이 기간동안 패현의 [[전한 고제|유방]](劉邦)이 함양에 먼저 입성하여 함양왕이 되려하자 서둘러 함곡관을 향해 진군하였다. 유방이 함곡관에서 자신을 막고 항거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유방을 죽이려 하였으나 유방이 지레 겁을 먹어 함곡관 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에 항우는 유방을 홍문에 불려내 범증의 말처럼 죽이려 하였으나, 장량의 계책에 빠져 결국 죽이지 못하고 유방의 항복을 받은 후 유방을 풀어줬다. 이후 항우는 함양성에 입궁하여 [[진왕 자영]]을 죽이고 도성 함양에 아방궁과 일부 건물을 불사른 뒤에 [[금의환향]](錦衣還鄕: 금의환향의 고사도 항우에게서 태어났다)의 명목으로 [[팽성군|팽성]]에 도읍한 후 서초 패왕이라 칭하였다. 본래 자신이 숙부 항량과 함께 세웠던 초나라의 [[초 의제|의제]]를 [[기원전 206년]]에 암살했다. 한편 [[전한 고제|유방]]으로 하여금 찬탈자를 친다는 명목으로 거병하는 원인을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