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저우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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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한 시대 ===
양저우는 그 지역을 칭할 때 위(谓)라고 불렸는데 《[[서경 (책)|상서]]》 우공편에는 "회해(淮海)에는 [[양주 (안후이성)|양주]]라"(淮海維揚州)라고 해서 화하(華夏) 9주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연대가 너무 멀어서 오늘날의 양저우와 《상서》의 양주는 서로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춘추시대 지금의 양저우 시 구역 부근은 한(邗)이라고 불렸다. [[기원전 486년]]에 [[오나라]]가 이곳을 병탄하고 한성(邗城)을 쌓고 한구(邗沟)라는 이름의 운하를 파서 장강,회하(淮河)와 연결하였다. 이는 지금의 양저우 시 구역 안에 구축된 가장 이른 시기의 성시(城市)였다. 한대에는 지금의 양저우 시를 [[광릉군|광릉]]이라고 불렀고, 13자사부 가운데 하나인 [[서주자사부]]에 속했고 양저우에는 속하지 않았으며, 오랫동안 왕후(王侯)들의 봉지였다. 오왕 [[유비 (오왕)|유비]]는 산에서 화폐를 주조하고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들었으며, 염하(鹽河)라는 운하를 파고(통양운하의 전신이다) 한 왕조에 맞서 독립을 시도하였는데([[오초칠국의 난]] 참조) 이 시기 양저우의 경관은 일시에 크게 성하였으며 경제적 발전을 촉진하였고 양저우의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렸던 첫 번째 시기가 이로써 시작되었다. 당시 한 왕조는 정치적 고려에 따라 [[원봉 (전한 무제)|원봉]] 6년(기원전 105년) [[전한 무제|무제]]가 강도왕 [[유건 (강도왕)|유건]]의 딸인 [[유세군]]을 데려다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왕국인 오손국(烏孫国)에 시집보냈다.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보내지기 80년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