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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헤이조쿄(平城京)의 북단에 위치해서 천황이 거주하는 다이리(内裏) 즉 내정(内廷)과 의식이 거행되는 조당원(朝堂院), 관리들이 집무를 행하는 관아(官衙)라 불리는 외조(外朝)로 이루어져 약 120헥타르의 면적을 점유하고 있었다. 주변은 5미터 정도의 큰 담이 둘러져 있었고 주작문(朱雀門)을 비롯해서 호족의 성씨에서 그 이름을 따온 12개의 문이 설치되어 관리들은 각자의 문으로 드나들었다. 동단에는 동원정원(東院庭園がおかれ、)이 위치해서 연회 등이 벌어졌다. 이 東院庭園은동원정원은 오늘날의 일본 정원의 원형이 되었다.
 
다만 헤이조쿄에 수도를 두고 있었던 70여 년 정도의 사이에 몇 번이나 대규모의 개축이 실시되었고, 그 사이에 헤이조쿄 내부의 구조에 변화도 있었는데 그것이 훗날의 연구자들에게는 별로 인식되지 않아 실제로 본격적인 발굴이 실시되기까지 잘못된 추정을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엔랴쿠]](延暦) 3년([[784년]]) 나가오카쿄(長岡京)로 천도하고 그 뒤에 [[헤이제이 천황]](平城上皇)이 대극전(大極殿, 제1차) 터에 새로운 궁(헤이제이 서궁平城西宮)을 지어 거주하기도 하였는데, '''헤이안쿄'''(平安京)의 수도로써의 지위가 확정되고 나서는 방치되어 차츰 농지로 변모해갔다. 그럼에도 헤이조쿄가 있던 나라는 이후에도 '''남도'''('''南都''')라 불리며 '본래의 수도는 나라'라는 인식이 존재하였다.
 
[[가에이]](嘉永) 5년(1852년) 부교도코로(奉行所)의 관리였던 기타우라 사다마사(北浦定政)가 《평성궁대내리적평할지도》(平城宮大内裏跡坪割之図)를 저술해 헤이조쿄의 터를 추정하였다. 메이지 시대에 건축사가(建築史家)인 세키노 다다시(関野貞)는 논 가운데 있는 작은 풀밭이 대극전(제2차)의 기단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1907년]](메이지 40년) 《평성궁급대내리고》(平城京及大内裏考)를 당시 나라신문(奈良新聞)에 발표한다. 다만 세키노 다다시의 연구는 대극전(제1차)의 구니노쿄(恭仁京)로 이전한 것을 포함해 헤이제이쿠의 거듭된 개축 사실을 인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극전(제1차)을 다이리의 유구로 오인한 것으로 중궁(中宮, 중궁원中宮院이라고도 하며 쇼무聖武 ・ 준닌淳仁 두 천황의 거처였다)를 무조건 다이리의 별칭으로 해석해서 다이리 위치를 오인한 바람에 실제 다이리 구역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등, 오늘부터 보면 문제가 되는 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