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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넘어옴|USSR|조사=은}}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llang|ru|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 / СССР |소유스 소베츠키흐 소치알리스티체스키흐 레스푸블리크 / 에스에스에스에르}}, {{문화어|쏘베트사회주의공화국련맹}}), 약칭 '''소비에트 연방'''({{llang|ru|Сове́тский Сою́з|소베츠키 소유스}}) 또는 '''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2월 혁명]]은 [[러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혁명 이후 수립된 [[러시아 임시 정부]]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10월 혁명]]으로 붕괴하였고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정권을 잡았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백군]]이 반란을 일으켜 [[러시아 내전]]이 일어났지만 [[볼셰비키]]는 내전에서 승리하였다.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통합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하였다.
== 국명과 상징 ==
{{마르크스-레닌주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라는 명칭은 [[소비에트]] ({{llang|ru|Совет}})에서 나왔는데, 이는 [[러시아어]]로 '평의회' 또는 '노동자-농민 평의회'를 뜻한다. 노동자, 농민, 군인의 공동체 조직인 소비에트는 직접민주제, 간접민주제를 거부하고, 인민민주 상향식 선거를 통해 일당제 체제 하에서 평의회 대의원을 선출한다. 작게는 각 생산수단 및 소공동체에서부터 크게는 [[모스크바]]의 [[최고 소비에트]]에 이르기까지 각 계층에 걸쳐 설치되어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러한 체제는 [[블라디미르 레닌]]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파리 코뮌]]의 형태와 러시아 특유의 소비에트 제도를 본따서 만든 제도라고 밝혔다. 이러한 체제가 [[카를 마르크스]]가 최초로 주장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조금 다른 점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소비에트 제도의 경우 노동자, 농민, 혁명가들로 구성된 '혁명적 당'이 장기간 일당 독재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정치 제도가 하나의 '정통적 체제'로 대변된다는 점에 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원형은 '당'을 [[사회주의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 시기에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진행하기 위한, 일종의 '민주적 폭력'을 실행하기 위한 체계화 된 조직으로 묘사했고, 이러한 사회주의 체제에서의 정당 독재는 [[공산주의]] 사회에 진입한 후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의 소비에트 제도는 공산당 일당 독재의 장기화했고 이러한 제도를 바탕으로 모든 공산주의적 정책을 실행했다. 학문적으로 보면
=== 국기 ===
[[
=== 국장 ===
[[
국장 가운데에는 지구를 배경으로 금색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으며 지구 아래쪽에는 떠오르는 금색 태양이, 지구 위쪽에는 빨간색 별이 그려져 있다.
국장 양쪽을 밀 이삭이 감싸고 있으며 빨간색 리본이 이를 묶고 있다. 빨간색 리본에는
== 역사 ==
{{본문|
{{본문|러시아의 역사}}
{{러시아의 역사}}
44번째 줄:
{{본문|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았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은 [[중앙유럽]] 일대를 [[독일인]]의 생활권({{llang|de|Lebensraum}} <small>레벤스라움</small>)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은 [[중앙유럽]] 국가를 [[공산주의|공산]]화하여 [[위성 국가]]로 두고 싶어 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은 전후
=== 냉전 ===
{{본문|냉전}}
[[파일:Szent István körút a Falk Miksa (Néphadsereg) utca felől a Honvéd utca felé nézve. A szovjet csapatok ideiglenes kivonulása 1956. október 31-én. Fortepan 24787.jpg|섬네일|오른쪽|[[헝가리 봉기]] 때 [[부다페스트]]로 입성하는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등장한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여 전체주의 독재 정책을 크게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또한, [[1956년]]에
[[제2차 세계 대전]]에서
[[1960년대]]에 들어와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 체제가 안정되면서 미국과의 관계는 다소 개선되었다. 그러나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의 개혁 노선에 회의적이었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이끄는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의 관계는 반대로 악화되었다.
[[파일:Nixon Kosygin May 1972.jpg|섬네일|왼쪽|[[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알렉세이 코시긴]]
[[1964년]]에 실각한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에 이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 아프가니스탄 침공 ===
{{본문|
[[1979년]] [[12월 27일]]에 브레즈네프는 [[아프가니스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고 [[
=== 페레스트로이카 ===
{{본문|페레스트로이카}}
[[파일:Reagan and Gorbachev hold discussions.jpg|섬네일|오른쪽|350px|[[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로널드 레이건]]의 회담 (1985년)]]
[[1982년]] 11월 브레즈네프가 죽고 [[유리 안드로포프]]가
또한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 집권 후
동구권의 붕괴로 냉전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1989년]] [[12월 3일]] [[몰타 회담]]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와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냉전이 종결되었다는 선언을 하였다.
=== 해체 ===
{{본문|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는 유럽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보였지만
== 지리 ==
[[파일:USSR-Tajikistan-Peak Communism.jpg|섬네일|오른쪽|300px|[[타지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있는 콤무니즘봉([[이스모일소모니봉]]), [[1989년]].]]
[[1991년]] 당시,
*
*
*
== 공화국 ==
{{본문|
인구 100만이 되지 않는 민족은 그 규모에 따라 [[자치 공화국]](ASSR), 자치주, 자치관구를 이루었다. 그들도 독자적인 헌법과 최고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파일:USSR Republics Numbered Alphabetically.png|섬네일|350px|
202번째 줄:
[[파일:Redsquarenight.jpg|섬네일|오른쪽|220px|[[붉은 광장]]]]
[[레닌]] 시대 초기와 [[고르바초프]] 시대 후반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
고르바초프 시대 마지막에 잠시 대통령제를 도입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시대 이래
{{본문|
[[파일:Nikita Khruchchev Colour (cropped).jpg|섬네일|오른쪽|220px|[[니키타 흐루쇼프]] (1961년)]]
[[파일:1977 CPA 4774(Cutted).jpg|섬네일|오른쪽|220px|[[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77년)]]
역대
* [[블라디미르 레닌]] (1922년 ~ 1924년)
221번째 줄:
*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5년 ~ 1991년)
=== 내각 ===
내각은
역대
* [[이오시프 스탈린]] (1941년 5월 6일 ~ 1945년)
235번째 줄:
=== 정치국 ===
'''[[
[[1990년]]에 열린 제28차 당대회에서는 정치국의 권한을 [[최고 소비에트]]로 이양하는 것이 승인되었다. 정치국은 [[1991년]] [[8월]]의 쿠데타 실패 직후에 해산되었다.
[[1987년]]까지 정치국원은
=== 소비에트 최고 회의 ===
{{본문|소비에트 최고 회의}}
[[소비에트 최고 회의]](Верховный Совет)는
연방 회의(연방원)과 민족 회의(민족원)의 [[양원제]]를 택했으며, 임기는 모두 5년이었다. 연방 회의는 30만 명을 1개 선거구로 한 소선거구제를 택했고, 민족 회의는 각 민족별 인구를 반영해 설치했다. 그 대의원은
== 경제 ==
{{본문|
[[파일:Soviet Union-1989-Coin-0.50.jpg|섬네일|오른쪽|1989년,
[[1920년대]]에 일어난 [[러시아 내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도
[[1986년]]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
=== 소비재 ===
266번째 줄:
=== 무역 ===
그에 비해 위성국이나 공산국가들과의 무역은 1차 상품이나 에너지 자원은 물론, [[전자제품]]이나 소비재, 공작기계로부터 [[자동차]], [[항공기]] 등의 군사 물자까지도 수출되었다. 또한 그 대부분의 물자가 사실상의 원조품으로서 무상에 가까운 형태로 공급되었다.
274번째 줄: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8년]]부터 5개년 계획을 실시하면서 [[콤비나트]] 공업지대를 만들었다. 유명한 콤비나트로는 드네프르 콤비나트, 앙가라-바이칼 콤비나트, 우랄 콤비나트, 쿠즈네츠크 콤비나트 등이 있다.
=== 농업 ===
콜호스는 집단농장으로, [[1928년]]에 시작된 [[이오시프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다. 콜호스는 국유지를 무료로 사용하고 경작을 실시했으며 이에 따라 부농을 의미하는 [[쿨라크]]가 일소되었다. 농기구나 가축 등은 공유되었으며 생산물은 정부에 매각되었다.
각 개인의 주택에 부속된 소규모 농지에서 채소의 재배, [[가축]]의 사육이 가능했고 개인이 생산한 생산물은 자유롭게 판매해도 되었다. 생산력 향상이 농민의 수입 증가에 직접 연결되는 이 자류지 재배는 집단농장보다 높은 효율성을 나타내서 취약한
== 국경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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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일]] || [[새해]] || Новый Год ||
|-
| [[2월 23일]] || [[조국수호의 날|
|-
| [[3월 8일]] || 국제 [[여성의 날]] || Международный Женский День ||
305번째 줄:
== 군사 ==
{{본문|
[[파일:October Revolution celebration 1983.png|섬네일|300px|[[1983년]] 혁명 축하 군사 퍼레이드]]
[[파일:Evstafiev-Soviet-soldier-Afghanistan.jpg|섬네일|200px|오른쪽|아프가니스탄에서 싸우는
그러나 이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하여서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였으며, 이는 국민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하였다. 그리고 [[1979년]]부터 10년 동안 계속된 [[
또한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나라에 무기와 그 기술을 수출하고 장교 등을 파견하여 군사 훈련을 하여, 그들 나라의 군사 기술의 향상에 기여하였으며, 그 중에는 [[스파이]]나 [[테러리스트]]의 양성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 군사 퍼레이드 ===
== 과학 ==
또한
[[파일:Mirdream_sts76.jpg|섬네일|왼쪽|
그러나
== 노동운동 ==
== 문화 ==
* [[
* [[
* [[
* [[
*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 복지 ==
[[파일:Soviet blocks, Liepaja.jpg|250px|오른쪽|섬네일|
노동 복지는 당시 자본주의 선진국에 비해 일찍 시작했지만, 법 조항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실질적인 복지 수준이 매우 미비한 수준이었다. 일례로,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외국인노동자차별금지법, 아동노동금지법, 양성평등고용법 등을 명문화하는 동시에 이러한 법들이 실질적으로 실행되기 위해 국가가 책임을 지고 노력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또한 법적으로 지정된 공휴일과는 별도로 각 산업지마다 약 연평균 25일의 휴일을 주었다. 1917년 11월 11일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최초로 일 8시간, 주 48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일 8시간 내지는 일 10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던 [[유럽]] 국가들의 노동 정책에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내전기에서 [[1950년대]]까지, 그리고 광부 등의 특정 직종에 대해서는
[[1920년대]] 후반부터 고성장을 해온
총 소득 가운데 [[교육]], [[의료]], [[주거]] 등 여러가지를 보장해주는 사회적 임금의 비중이 높은 편에 속했다. 주거 복지의 경우는 [[1950년대]] 후반부터 짓기 시작한 호당 평균 9평 짜리 5 ~ 7층(층당 평균 8호) 패널형 아파트인 [[흐루쇼프카]]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ref>{{웹 인용 |url=http://www.ukraine-observer.com/articles/228/993 |제목=보관 된 사본 |확인날짜=2007년 2월 6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206132350/http://www.ukraine-observer.com/articles/228/993 |보존날짜=2007년 2월 6일 |깨진링크=예 }}</ref>. [[식량]]의 경우는 러시아 소비에트 시절인 [[1918년]]부터 각 소행정단위마다 존재하는 식량 배급소에서 일정 식량을 배급했다. 이러한 배급은 [[1921년]] 신경제정책을 도입하면서부터 다시 폐지되었고, [[1929년]]에는 식량배급제가 다시 부활했다. [[1935년]]에는 식량 분배 수위를 국가가 조절할 필요가 사라지면서 다시 폐지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부활하여 [[1940년대]] 후반까지 시행되었다.
=== 교육 ===
[[파일:Milovice soviet pupils.jpg|섬네일|[[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한
공산주의 혁명 이후 러시아 내전과 전시 공산주의는 학교 교육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1914년 어린이의 91%가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으나, 1920년 24.9%에 불과했다.<ref>Russia U.S.S.R.: A Complete Handbook
New York: William Farquhar Payson. 1933. p. 665.</ref>
이에 따라 1926년까지 교육 수준은 퇴보했으며 당시 문자해독율은 56.6%였다. 1923년에 초등학교 4학년까지 의무교육이 시작되었고,
냉전기에
=== 의료 ===
{{인용문|모든 국민은 건강 보호를 요구할 자격이 있으며
혁명 이후 [[1918년]]에 정부는 "의료는 국가의 관리 하에 둘 것이고, 의료는 무료로 시민들에게 제공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혁명 이후
== 스포츠 ==
[[1980년]]
== 언론 ==
[[
서방 언론의 특파원은 기본적으로 국내를 자유롭게 취재, 보도하는 것이 금지되고 있어 사전에 신청이 필요했다. 또한 취재처의 선택 및 일정은 모두 준비 된 것에 따라야 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등의 국제적 이벤트나, 외국의 수뇌진이 공식 방문을 할 때
== 인구 ==
[[파일:Population of former USSR.PNG|섬네일|250px|
다수를 이루는 민족은 [[러시아인]](50.78%)이고, 다음은 [[우크라이나인]](15.45%), [[우즈베크인]](5.84%)의 순이었다. 그 이외에도 [[벨라루스인]](3.51%), [[카자흐인]](2.85%), [[아제르바이잔인]](2.38%), [[아르메니아인]](1.62%), [[타지크인]](1.48%), [[조지아인]](1.39%), [[몰도바인]](1.17%), [[리투아니아인]](1.07%), [[투르크멘인]](0.95%), [[키르기스인]](0.89%), [[라트비아인]](0.51%), [[에스토니아인]](0.36%), 기타(9.75%: [[타타르인]], [[체첸인]], [[독일인]], [[야쿠트인]], [[바슈키르인]], [[유대인]], [[헝가리인]] 등)등의 민족이 있었다.
인구 증가율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와 [[발트 3국]]([[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리투아니아]])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우크라이나]]에서는 낮았던 데 비해, 캅카스 3국([[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그루지야]])과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몰도바]]에서는 높았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인이
== 언어 ==
{{본문|
공식적 언어는 없었으나 사실상 [[러시아어]]가 공용어 역할을 하면서 주로 사용되었다.
== 외교 ==
[[파일:ViewOnRussianMinistryOfForeignAffairsMuilding,Moscow,Russia,2003-05-09.jpeg|섬네일|240px|오른쪽|
=== 위성 국가 ===
이들 위성 국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 [[불가리아]]
416번째 줄:
=== 대한민국과의 관계 ===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대한민국]](남한)과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과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과
=== 미국과의 관계 ===
공산국가들의 맹주였던
그러나 [[베를린 봉쇄]]나 [[쿠바 위기]] 등에서는 전면적인 군사적 대립의 일보직전까지 갔으며, [[영공]]을 침범한 미군기의 격추 등 한정적인 군사적 대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대립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식 국교가 끊어진 적은 없고, 쌍방의 [[수도]]에 대한 민간기의 노선연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항공 007편|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나 [[
=== 일본과의 관계 ===
[[일본]]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만주국]]과의 국경에서 종종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노몬한 사건]] 등). [[1941년]] [[4월]]에 소-일 중립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945년]] [[8월 8일]]에
그 후, [[1956년]]에 소-일 공동 선언을 통해 국교가 회복했지만, 일본이 미국의 동맹국인데다가 [[쿠릴 열도 분쟁]]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 개선은 진전되지 않은 채 냉전이 종결되었다.
===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
[[국공 내전]]에서
=== 출국 ===
출국은 망명과 외화 유출을 막는 것을 주된 이유로 당국의 허가가 없는 한 출국은 불가능했다. 또, 자유 진영 국민과의 교제나 [[결혼]]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심지어 위성국 국민과의 결혼조차도
또한 외국 항로를 운행하는 선박이나 외국에서 연주여행을 하는 악단 등에는, 승무원이나 악단원의 망명을 저지하고 서방 언론 노출을 감시하기 위해서 반드시 공산당의 [[정치장교]]가 동행하고 있었다.
== 종교 ==
== 치안 ==
== 프로파간다 ==
프로파간다는
==
{| cellpadding="10"
|- valign="top"
485번째 줄:
== 같이 보기 ==
* [[
* [[
* [[
* [[
* [[냉전]]
* [[군비 경쟁]]
496번째 줄:
* [[크렘린]]
* [[국가보안위원회]]
* [[
* [[공산주의]]
* [[사회주의]]
509번째 줄:
* {{언어링크|en}} [http://www.soviethistory.org/ The Soviet Union]
{{
{{
{{
{{러시아의 옛 국가와 독립국}}
{{
{{
{{동구권}}
{{유엔 창립 회원국}}
520번째 줄:
{{전거 통제}}
[[분류:
[[분류:유럽의 옛 나라]]
[[분류:아시아의 옛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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