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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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인인 [[베르길리우스]]와 [[호라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의 수호자, 도덕 규율을 바로잡은 자, 제국을 짊어지고 갈 의무를 기꺼이 진 자로 묘사하였다.<ref name="kelsall 120">Kelsall, 120.</ref> 하지만 통치 기간에 원수정을 확립한 것 때문에 동시대인들에게 비판받기도 하였다. 동시대의 법학자, 공화정의 추종자인 마르쿠스 안티스티우스 라베오(? ~ 서기 [[10년]] 또는 [[11년]])는 공개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체제를 비판하였다.<ref name="starr 5">Starr, 5.</ref> [[타키투스]]는 〈[[타키투스의 연대기|연대기]]〉의 서문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교활한 방법으로 공화정 로마를 노예처럼 만들었다고 서술하였다.<ref name="starr 5"/>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난 뒤에 [[티베리우스]]가 이 자리를 물려받았고, 로마의 사람들은 노예 매매와 같이 계속하여 다음 주인에게 넘어갔다.<ref name="starr 5"/> 하지만 타키투스는 [[네르바]]가 “원수정”과 “자유”라는 서로 이질적인 두 생각을 잘 조화시켰다고 믿었다.<ref name="starr 6">Starr, 6.</ref> 3세기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친절하고 관대한 통치자라는 점은 인정하였지만, 동시대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아우구스투스를 전제군주로 보았다.<ref name="starr 5"/> 시인인 마르쿠스 아나에우스 루카누스([[39년]] ~ [[65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소 카토]]와의 전쟁에서의 승리는 로마의 전통적 자유가 끝난 상징적인 사건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 역사가인 [[체스터 G. 스타 2세]]는 루카누스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하지 않은 이유가 그러기엔 너무나도 신성불가침의 존재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썼다.<ref name="starr 6"/>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Discourse on the Contests and Dissentions in Athens and Rome''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로마에 [[전제군주제]]를 도입했다는 이유로 비판하였고 [[대영제국]]의 [[입헌군주정]]을 기원전 2세기경의 로마 공화정에 비유하였다.<ref name="kelsall 118">Kelsall, 118.</ref> 장군이자스코틀랜드의 해군 장교이자 역사가였던 토머스 고든([[1658년]] ~ [[1741년]])은 아우구스투스를 [[올리버 크롬웰]]과 비교하며 비판하였다.<ref name="kelsall 118"/> [[토머스 고든 (군인스코틀랜드 해군 장교)|토머스 고든]]과 [[몽테스키외]]는 아우구스투스가 전장에서는 겁쟁이라고 평하였다.<ref name="kelsall 119">Kelsall, 119.</ref> [[스코틀랜드]]의 학자인 [[토머스 블랙웰]](Thomas Blackwell, [[1701년]] ~ [[1757년]])은 ''Memoirs of the Court of Augustus''에서 아우구스투스를 [[마키아벨리즘|마키아벨리 성향]]의 군주라 보았다.<ref name="kelsall 119"/>
 
=== 세제 확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