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10·1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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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내부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조선공산당]]을 제외한 좌익계열 9개 정당 대표들([[정백]]과 [[이영]])은 긴급 회동을 갖고 이번 싸움이 '[[박헌영]]의 공산당이 벌인 모험주의'라며 격렬히 비난했다.<ref name=autogenerated2 />
[[좌우합작]] 세력에서는 양비론을 내세웠는데, [[여운형]]과 [[김규식]]은 10월말 미군정청 브라운 소장과의 회담에서 "‘10·1 폭동’이 경찰에 대한 반감, 군정 내 친일파의 존재, 일부 한국인 관리의 부패, 파괴분자들의 선동 탓에 일어났다."고 군정청에 비난을 했다. 이어서 자칭 '대구폭동'이 미군정의 정책파탄에 따른 한국 민중의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사태를 살육과 파괴로 몰고 간 책임은 ‘신전술’로 과격한 투쟁 노선으로 기울어 잘못된 정책을 채택한 [[조선공산당]]에 있다."고 주장했다.<ref>
1946년 10월 24일 [[덕수궁]] 한미공동회담에 참석한 수도경찰청 수도국장 [[최능진]]은 "대구폭동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에 의한 불행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우리 경찰 내부에도 있다. 국립경찰은 친일경찰과 부패 경찰관들의 피난처가 되었다고 말했다." 당시 10월 민중항쟁의 이유 중에 하나였던 친일경찰의 실태를 자신들의 입으로 증거한 것이었다.<ref name="최능진">KBS 다큐멘터리 《인물현대사》 20편, -민족이 최선이다.- 최능진 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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