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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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ila hora rekonstrukce 4.jpg|섬네일|왼쪽|200px|[[백산 전투]]의 재현]]
보헤미아 분쟁은 여전히 지역적인 분란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마티아스]] 황제의 죽음 이후 개신교 반란 지도자들은 대담해졌다. 마티아스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공식적인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2세]]와 보헤미아 반란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분쟁이 서부 독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인 그의 조카 [[필리프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황제에 맞선 동맹에 대해 결사적이었던 보헤미아 인들은 칼뱅파였던 팔츠 선제후였던 칼뱅교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의 후보로 내세우고 있었고 프리드리히 5세는 개신교 제후동맹을 이끌고 있었다. 보헤미아는 제후동맹에 자국을 가입시켜준다면 프리드리히 5세에게 보헤미아 왕위를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작센 선제후국의 [[작센의 요한 게오르크 1세|요한 게오르크 1세]], 헝가리 왕 [[베틀렌 가보르]]에게도 같은 약속이 주어졌다. 프라하를 떠나는 모든 서신들을 가로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오스트리아 인은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공연히 알렸다.<ref>{{서적 인용|author1=T. Walter Wallbank|author2=Alastair M. Taylor|author3=Nels M. Bailkey|author4=George F. Jewsbury|author5=Clyde J. Lewis|author6=Neil J. Hackett|author7=Bruce Borland (Ed.)|title=Civilization Past & Present Volume II |publisher=Harper Collins Publishers|pages=''15. The Development of the European State System: 1300–1650.''|location=New York, N.Y|year=1992|isbn=0-673-38869-7|accessdate=23 May 2008|url=http://history-world.org/The%20Thirty%20Years'%20War.htm|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614022544/http://history-world.org/The%20Thirty%20Years'%20War.htm|보존날짜=2016-06-14|깨진링크=예}}</ref> 이는 보헤미아인들에 대한 지지가 추락하는 원인이 되었고, 작센은 아예 이들에게 신임을 주지 않았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란은 보헤미아인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귀족들 대부분이 루터파와 칼뱅파였던 [[오버외스터라이히]]가 반란에 동참했고, 곧 [[니더외스터라이히]]가 반란을 일으켰다. 1619년에는 [[진트리히 마타야스 트런]]이 [[비엔나]] 성벽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더욱이 영국 제도에서는 프리드리히 5세의 반란이 유럽의 조엘리라 묘사되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문제로 비춰지게 되었다.<ref>Kellie, ''Pallas Armata'', p. 2a; Monro, ''His Expedition'', vol. 1, p. 37.</ref> 이는 30년 전쟁 전반에 걸쳐 수천 명의 지지자들이 엘리자베스 스튜어트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흐름을 내놓기도 했다. [[호레이스 베레]]가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이 전쟁 초기에 팔츠 선제후 지역으로 이동했고 존 세톤이 이끄는 스코틀랜드-네덜란드 연합군이 보헤미아로 이동했다. 그리고 후에 이들은 혼성 부대인 브르타뉴 여단에 참여하게 된다.<ref name=polisensky>Joseph Polisensky, "A Note on Scottish Soldiers in the Bohemian War, 1619–1622" in Steve Murdoch (ed.), ''Scotland and the Thirty Years' War, 1618–1648'' (Brill, Leiden, 2001), pp.&nbsp;111–114</ref> 세톤의 여단은 1622년까지 트레본 마을을 사수한 여단으로, 보헤미아에서는 최후의 개신교 동맹이었다.<ref name=polisens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