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기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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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누르가치의 통치 하에 들게 된 모든 인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노복까지 팔기의 구성원으로 등록되어 기인(旗人, {{llang|mnc|{{MongolUnicode|ᡤᡡᠰᠠᡳ<br />ᠨᡳᠶᠠᠯᠮᠠ}}|Gūsa-i Niyalma}})이 되었다.
 
팔기는 오늘날의 군대처럼 징병되거나 모병에 응한 병사들을 개인 단위로 뒤섞는 방식으로 조직되지 않았고,복속된 기존의 씨족이나 부족을 팔기의 기층 단위인 니루로 변형하는 방식을 통해 조직되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씨족장이나 부족장이 니루의 수장인 니루어전(牛彔额真, {{llang|mnc|{{MongolUnicode|ᠨ᠋ᡳᡵᡠᡳ<br />ᡝᠵᡝᠨ}}|Niru-i Ejen}})에 임명되어서 과거에 자신이 관할했던 조직을 그대로 관할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이 모든 부족에 동일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누르가치는 자신에 대한 충성도나 반란의 가능성을 고려하여 부족마다 방식을 상이하게 적용하였다.
 
[[동해여진]]으로 만든 20개의 니루 가운데 본래 씨족이나 부족의 수장이 니루어전으로 유지된 경우는 18개였다. 이를 보면 동해여진은 본래의 조직을 팔기 내에서도 대부분 그대로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누르가치의 본래 세력 기반인 건주여진의 니루 편성도 대체로 기존 조직을 기반으로 했고, 니루의 규모도 다른 여진보다 컸다. 그러나 통일 전쟁에서 저항이 심했던 [[해서여진]]은 이와 달랐다. 누르가치는 복속된 해서여진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해서여진이 자신들만의 니루를 구성하는 것을 경계했다. 자발적으로 누르가치를 따르거나 과거의 친교관계를 유지해 온 소수의 해서여진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조각조각 분리되어 건주여진 니루에 배속되었다. 팔기를 만든 초기에 총 239개의 니루가 설립되었는데, 96개는 건주여진인이 니루어전이었고, 67개는 동해여진인이 니루어전이었으며, 47개만이 해서여진인이 맡았다. 나머지 29개 가운데 16개는 [[몽골]] 니루였고, 13개는 분명치 않다.
 
기존의 씨족(Hala, {{llang|mnc|{{MongolUnicode|ᡥᠠᠯᠠ}}|Hala}})과 촌락(Gašan, {{llang|mnc|{{MongolUnicode|ᡤᠠᡧᠠᠨ}}|Gašan}}) 구조를 깨지 않고 니루로 만들거나, 기존 구조를 깨고 니루를 만드는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누르가치는 팔기를 [[후금]]의 발전과정에서 중앙집권적인 권력의 핵심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패전해서 통합된 경우, 특히 해서여진은 대개 기존 조직의 구성원들을 분할해서 여러 니루에 분배했다. 니루의 규모는 다양했는데, 자발적으로 복종한 집단은 니루의 정원인 300명에 못 미치더라도 자체적으로 니루를 만들 수 있게 허락했고, 저항했던 집단은 분할하여 니루의 수를 맞추는 데 충원했다. 또한 혈연과 지연의 내부적 결합이 흔들리지 않고 니루로 이어진 경우에도, 니루를 각 궈사에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부족의 결합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외부와 섞이지 않은 자체적인 니루를 갖추었던 동해여진의 20개 니루를 추적해보면, 7개는 양황기에, 4개는 정황기에, 3개는 정홍기에, 2개는 양홍기에, 2개는 정백기에, 1개는 양백기에, 1개는 양남기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설사 부족이 하나의 구사에 소속되었어도 다른 자란에 소속되어서 분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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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가치는 이런 방식으로 팔기를 조직함으로써 통일된 여진의 결합력을 강화하고 [[반란]] 가능성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팔기만으로 통합이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636년]], [[숭덕제]]는 만주와 몽골의 왕들과 [[한족]] 무장들에게 추대되어 세 민족을 주축으로 하는 [[대청국]]의 황제에 즉위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만·몽·한의 삼분 체제가 팔기에 적용되어 갔다. 몽고 니루는 [[1635년]]에 정식으로 분리되어 몽고 궈사구사({{llang|mnc|{{MongolUnicode|ᠮᠣᠩᡤᠣ<br>ᡤᡡᠰᠠ}}|Monggo Gūsa}})가 되었고, 한인 병사는 [[1637년]]에서 [[1642년]] 사이에 팔기 가운데 한군(重軍, {{llang|mnc|{{MongolUnicode|ᡠᠵᡝᠨ<br>ᠴᠣᠣᡥᠠ}}|Ujen Cooha}})으로 조직되었다. 몽고 부대와 한인한군 부대가 독자적인 구사로 떨어져나가면서 기존의 구사는 만주 구사({{llang|mnc|{{MongolUnicode|ᠮᠠᠨᠵᡠ<br>ᡤᡡᠰᠠ}}|Manju Gūsa}})로 불리게 되었다. [[1642년]]에는 '''만주팔기'''(满洲八旗, {{llang|mnc|{{MongolUnicode|ᠮᠠᠨᠵᡠ<br>ᠵᠠᡣᡡᠨ<br>ᡤᡡᠰᠠ}}|Manju Jakūn Gūsa}})에 '''몽고팔기'''(蒙古八旗, {{llang|mnc|{{MongolUnicode|ᠮᠣᠩᡤᠣ<br>ᠵᠠᡣᡡᠨ<br>ᡤᡡᠰᠠ}}|Monggo Jakūn Gūsa}})와 '''한군팔기'''(漢軍八旗, {{llang|mnc|{{MongolUnicode|ᡠᠵᡝᠨ<br>ᠴᠣᠣᡥᠠᡳ<br>ᠵᠠᡣᡡᠨ<br>ᡤᡡᠰᠠ}}|Ujen Coohai Jakūn Gūsa}})이 더해짐으로써 24개의 구사가 창설되면서 마침내 완전한 팔기제가 구성되었다완성되었다.<ref>{{서적 인용|author=이훈|authorlink=|title=만주족 이야기|series=|publisher=너머북스|isbn=9788994606514|page=}}</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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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image|The Grand Review - No.3 - Reviewing Battle Formation cropped center.jpg|5000px|건륭제의 대규모 팔기군 사열식.}}
 
청 제국은 [[1634년]]부터 [[1640년]]까지 흑룡강 유역의 광대한 지역을 원정했고, 투항시킨투항한 소론(索倫, Solon), [[에벤키족|어웡키]], [[오로촌족|오로촌]], [[다우르족|다후르]]와 [[야인여진|동해여진]]의 일부를 만주팔기의 일부로 편제했다. 이때 팔기에 편입된 이들은 새로운 만주라는 의미로 '신만주'(新滿洲, {{llang|mnc|{{MongolUnicode|ᡳᠴᡝ<br />ᠮᠠᠨᠵᡠ}}|Ice Manju}})라고 불렸다. 이들 신만주를 제외한 본래의 만주는 자연스럽게 구만주(舊滿洲, {{llang|mnc|{{MongolUnicode|ᠮᠠᠨᠵᡠ<br />ᡤᡡᠰ}}|Ice Manju}})로 불리게 되었다<ref>劉小萌, 「關於淸代“新滿洲”的幾個問題」, 『滿族研究』, 1987, 3쪽</ref> 또한 [[흑룡강]] 유역에서 포로로 잡은 [[코사크|러시아인]]과 [[타이완]]에서 투항한 [[정씨왕국|정씨 집단]]이 각각 니루로 조직되어 만주팔기와 한군팔기에 편입되었다. [[건륭]] 연간에는 [[위구르]] 무슬림과 [[티베트인]]으로 구성된 니루가 새로 조직되어 만주팔기에 편입되었고, 베트남에서 밀려난 레(黎)씨 왕조의 망명 집단 역시 니루로 조직되어 한군팔기로 편입됐다.<ref>{{서적 인용|author=구범진|authorlink=|title=청나라, 키메라의 제국|series=서울대 인문 강의|publisher=민음사|isbn=9788937484940|page=215~216}}</ref>
 
[[도르곤]]의 사후 [[순치제]]는 도르곤이 기주였던 정백기를 몰수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 이로써 양황기, 정황기, 정백기 등 세 구사는 황제를 받들게 되었다. 이후 세 구사를 통칭하여 상삼기(上三旗)라 부르고 나머지 다섯 구사를 하오기(下五旗)라고 불렀는데 순치제는 자신의 지분을 ⅜으로 늘려 조금 더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한 것이었다. 이후 [[옹정제]]는 기주의 구사에 대한 지배력을 대폭 약화시켜 팔기 전체에 대한 황제의 장악력을 크게 제고하는강화하는 개혁을 단행하여 성공을 거두었다.<ref>{{서적 인용|author=구범진|authorlink=|title=청나라, 키메라의 제국|series=서울대 인문 강의|publisher=민음사|isbn=9788937484940|page=111~112}}</ref>
 
[[파일:Portrait of Li Hongzhang, 1871.jpg|섬네일|[[1871년]]의 직예총독 [[이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