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종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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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규 (함규)|왕규]] 역모설 ====
{{참고|왕규의 난}}
[[왕규 (함규)|왕규]]는 당시 [[왕무|혜종]]에게도 후궁으로 자신의 딸 [[후광주원부인|후광주원부인 왕씨]](後廣州院夫人王氏)를 시집보내 [[고려 태조|태조]]와 [[왕무|혜종]], 양인의 국구의 위치에 있었다. 이 때문에 광주원군 추대설은 후대에 [[고려 정종 (3대)|왕요]] 때나 [[왕소|광종]] 때에 날조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왕규 (함규)|왕규]]는 [[왕무|혜종]]에게 왕제인 [[고려 정종 (3대)|왕요]]와 [[왕소]]가 제위를 노리는 것 같으니 유의하라는 고변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왕무|혜종]]은 동생들을 시험하였다 하며 자신의 딸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을 [[고려 광종|광종]]의 후궁으로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무|혜종]]은 [[고려 정종 (3대)|정종]] [[왕소]]를 처벌하지는 않았다.
 
왕권다툼 속에서 혜종은 명확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945년]] 병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