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워싱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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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대영제국]], [[미국]]
|복무기간= [[1776년]] [[5월 20일1753년]] ~ [[1789년]] [[4월 22일]]
|계급=[[3성 장군|예비역 미국 육군 중장]] <br/> 명예역 미국 [[대원수]](추서)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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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대륙회의]]에서 워싱턴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 전쟁 첫 전투인 [[보스턴 전역]]의 [[렉싱턴 콩코드 전투]]부터 [[파리 조약 (1783년)|파리 조약]]으로 독립을 승인 받을 때까지 총사령관으로서 복무하였다. 워싱턴은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와해될 것 같았던 대륙회의를 주재하고, 각지에서 모인 결속력 없는 군대를 통솔하면서, 동맹국인 [[프랑스]]와 의견을 조율하여야 했다. 1783년 전쟁이 끝난 후 워싱턴은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의 영국의 국왕인 [[조지 3세]]는 워싱턴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만약 워싱턴이 그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787년, 조지 워싱턴은 [[연합 규약]]을 대체하는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열린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 의회]]를 주재하였다. 워싱턴은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마지막으로써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연방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정부 각 부서의 관례와 임무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워싱턴은 해외 문제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취하지 않는 정책을 택하였다. 1795년 워싱턴은 전쟁을 회피하고자 영국과 [[제이 조약]]을 맺었다. [[토머스 제퍼슨]]과 그가 이끄는 [[민주-공화당]]이 영국과의 조약을 반대하였지만, 워싱턴은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며 강행하였다. 워싱턴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부채를 조성하였고, 효율적인 세금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국가 은행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워싱턴은 공식적으로는 [[연방당]] 소속이었지만 퇴임 연설에서 당파성과 파벌주의 그리고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의 가담 등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공화주의적인 덕목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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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Washington (3).jpg|섬네일|오른쪽|200px|워싱턴의 공식 포스터]]
 
미국이 탄생되고 그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지만, 대부분의 대국민들은 아직도 대통령이란 자리가 무엇인지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고있었을 뿐더러, 그가 선출된 국왕이라고 생각했고, 대통령인 자신도 대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국왕이라고 생각하여 국왕처럼 행동하였다.
 
초기에 그는 자신에 대한 칭호로 국왕들이 스스로 말하는 자기를 3인칭 하는 단어를 상당히 좋아했고, 다른 국가의 국왕들처럼 위엄있는 몸가짐을 가지고 국왕처럼 대접받기를 원했다. 유럽 대륙의 왕실을 본받아 한없이 많은 접견회와 파티를 열었고, 영국과 프랑스의 국왕들처럼 그는 미국 전역을 호화롭게 여행하였고, 미국의 대국민들은 국왕을 맞이하듯 화려한 축하행사로 그를 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