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모 소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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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모 소린''' / '''오토모 요시시게''' ({{llang|ja|大友宗麟 / 大友義鎮}}, [[1530년]] [[1월 31일]] ~ [[1587년]] [[6월 11일]])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 [[분고노쿠니|분고]]의 센고쿠 [[다이묘]], [[기리시탄]](キリシタン) 다이묘이다. [[오토모 가문]](大友氏) 제 21대 당주이다. 본명 '''요시시게'''보다 '''소린'''이라는 법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우치 가문]]과 [[모리 가문]](毛利氏)을 비롯한 [[슈고 다이묘]](守護大名)와 [[고쿠진]] 토호 등의 세력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센고쿠 시대의 북규슈 동부를 평정하였다.
 
== 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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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모 가문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난보쿠초 시대]]에 걸쳐 다자이후 쇼니(少弐), 사쓰마 시마즈(島津)과 더불어 [[막부]]의 [[고케닌]](御家人)으로서 권세를 누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는 [[오우치 가문]](大内氏)의 규슈 진출에 대항하여 쇼니 가문과 연합하여 대항하였다.
 
오토모 소린은 [[교로쿠]](享禄) 3년([[1530년]]) 1월 3일、오토모 씨 20대 당주 ・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의 차남이자 적남(嫡男)으로써 [[분고 국]](豊後国) 고쿠후 내에서 태어났다. 관례를 올린 뒤에는 '''요시자네(義鎮)'''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어머니는 [[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의 딸로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의 누나이다. [[스오 국|스오]] 오우치 가문의 가독을 이은 [[오우치 요시나가]](大内義長)와 소린이 이복형제 간이라는 말도 있는데, [[구게]](公家) 출신의 딸 또는 가신의 딸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일설에 따르면 생모는 [[아소 고레노리]](阿蘇惟憲)의 딸이라고도 한다. 후야쿠(傅役)는 중신(重臣) ・ 뉴다 지카자네(入田親誠)가 맡았다.
 
아버지 요시아키는 요시오키의 이복 동생으로 [[오토모 시오이치마루|시오이치마루]](塩市丸)에게 가독을 넘겨주기로 계획하고 후야쿠 뉴다 지카자네와 함께 요시자네를 폐적(廃嫡)하려 했다. [[덴분]](天文) 19년([[1550년]]) 2월에 요시자네를 강제로 벳푸(別府)의 하마와키(浜脇)로 탕치(湯治, 온천 치료)를 보내놓은 사이에 요시자네파였던 다구치 쿠란도노스케 아키치카(田口蔵人佐鑑親)、쓰구미 미마사카(津久見美作, 실명은 알 수 없다)나 사이토 나가자네(齋藤長実)、오자이 야마토노카미(小佐井大和守)의 숙청을 계획하다가 이를 사전에 파악한 요시자네파 중신들이 모반을 일으켜 2월 10일에 시오이치마루와 그 어머니를 죽였고, 요시아키도 부상을 입고 2월 12일에 사망하였다(닛카이쿠즈레의 변二階崩れの変). 이를 계기로 요시자네가 요시아키의 유언을 받드는 형식으로 오토모 집안의 가독을 상속해 21대 당주가 되었다. 동시에 뉴다 등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요시아키 암살」의 주모자로 몰아서 숙청하였다.
 
=== 세력 확대 ===
덴분 20년([[1551년]]) 스오에서 오우치 요시타카가 가신인 스에 다카후사(陶隆房)의 모반으로 자결하고 요시자네는 다카후사의 요청으로 동생 하루히데(晴英, 오우치 요시나가)를 오우치 씨의 새로운 당주로 받들어 보냈다. 이로써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내내 지속되었던 오우치와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고 기타큐슈에서 오우치에 복속해 있던 고쿠진들이 오토모 가문으로 복속하게 되어 스오 ・ 나가토 방면으로도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대중국 교역의 거점이자 규슈 최대의 항구도시였던 하카타를 얻은 것은 오토모 가문에 있어서 큰 이익이었다. 고지(弘治) 3년([[1557년]])에 연합으로 중국 [[명나라|명]](明)에 파견한 견명선(遣明船)으로 요시자네는 왜구금제사(倭寇禁制使) 장주(蔣洲)를 호송해 감합(勘合)을 반포해 줄 것을 요청했고, 요시자네는 왜구에게 잡혀갔던 피로인을 송환하면서 「일본국왕」(日本国王)의 도장을 사용해 명에 조공하였다(이 도장은 모리 박물관毛利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복권을 노리던 숙부 기쿠치 요시타케(菊池義武)의 반란을 격퇴, 덴분 23년([[1554년]]) 기쿠치 씨(菊池氏)를 멸망시키고 히고 국(肥後国)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비명의 죽음, 나아가 요시자네가 당시 예수회를 통해 일본에 들어 온 기리시탄(크리스트교)에 관심을 보이며 [[프란치스코 자비에르]] 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오토모 가문의 영내에서의 크리스트교 포교를 허가한 것이 오토모 가문 가신단의 종교 대립으로 이어져, 덴분 22년([[1553년]])에 이치마다 아키스케(一萬田鑑相, 훗날 측실이 되는 이치마다 부인一萬田夫人이나 이치마다 아키자네一萬田鑑実의 아버지)와 무나카타 아키히사(宗像鑑久) 형제와 후쿠베 우쿄노스케(服部右京亮)、[[고지(연호)|고지]](弘治) 2년([[1556년]])에는 오하라 아키모토(小原鑑元)가 모반을 일으키는 등(성씨대립사건姓氏対立事件) 요시자네의 치세는 초기부터 고난의 연속이었다. 또한 이 무렵에 요시자네는 본거지를 후나이(府内)에서 뉴지마 성(丹生島城, 우가키 성臼杵城)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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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로쿠 3년([[1560년]])에는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로 임관하였다. 이리하여 요시자네는 명실공히 규슈에서의 최대 판도를 쌓아올렸고 오토모 가문의 전성기를 창출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에이로쿠 5년([[1562년]])에는 모지 성(門司城) 전투에서 모리 모토나리에게 패배하였고, 같은 해에 출가해 '''휴안 소린(休庵宗麟)'''이라 하였다. 그 뒤로도 소린은 아시카가 쇼군 가문에 대한 많은 원조를 지속했고 에이로쿠 6년([[1563년]])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쇼반쥬(相伴衆)에 임명되었으며, 에이로쿠 7년([[1564년]]) 요시테루에게 모리 가문과의 화친을 조정해 줄 것을 의뢰하고 기타큐슈에서 오토모 가문의 권익 확보를 실현시키는 등 관계는 깊어지게 되었다.
 
모리 가문은 [[산인도|산인]](山陰) 방면의 [[이즈모 국|이즈모]]의 아마고 씨(尼子氏) 집안을 멸망시키고 다시금 기타큐슈를 잠식해나가면서 양자간의 화친도 깨졌다. 에이로쿠 10년([[1567년]])、부젠이나 지쿠젠 국에서 오토모측 고쿠진이 모리 모토나리와 내통해 봉기하였는데, 여기에는 오토모 가문의 중신 다카하시 아키타네(高橋鑑種)도 가담하였다. 소린은 [[다치바나 도세쓰]](立花道雪) 등에게 명해 이를 평정하게 하였다. 또한 이때의 모리 가문과의 전투 와중에 소린은 예수회 선교사에게 철포에 사용되는 화약 원료인 초석의 수입을 요청하는데 그 이유에 대해 「나는 크리스트교를 보호하는 사람이고 모리 가문은 크리스트교를 탄압하는 놈들이다. 이들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오토모 가문에 양질의 초석을 제공하되 모리 가문에는 초석(硝石)이 수입되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는 편지를 보내고 있다. 에이로쿠 12년([[1569년]])、[[히젠 국|히젠]](肥前)에서 세력을 확대하던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를 치기 위해 자신이 군세를 이끌고 쳐들어 갔으나, 모토나리가 지쿠젠을 침공하는 바람에 황급히 돌아와야 했고, 다타라하마 전투(多々良浜の戦い)에서 모리 군에 타격을 입히는 한편으로 중신 요시오카 나가마스(吉岡長増)의 진언을 받아들이고 오우치 잔당인 오우치 데루히로(大内輝弘)에게 수군중(水軍衆) 와카바야시 사네오키(若林鎮興)를 딸려주어 스오에 상륙시켜 모리 가문의 후방을 노리게 했고, 모토나리는 [[아키 국|아키]](安芸)로 물러났다(오우치 데루히로의 난).
 
경제면에서는 하카타나 사카이(堺)의 호상(豪商)뿐 아니라 후나이의 호상 나카야 아키미치(仲屋顕通) ・ 무네고시(宗越) 부자를 후원해 어용상인화하고 저울과 무게추의 형량(衡量) 권익을 주어 대외 교역의 실무를 맡겼다. 무네고시는 우가키 성 아래의 도진마치(唐人町)인 아가타 정(懸ノ町)에 광대한 저택 부지를 보유하는 것이 허락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또한 그를 후하게 우대해 교토(京都)의 호코지(方広寺) 대불전(大仏殿)을 세우는 데에도 힘썼다고 한다.
 
「남만」(南蛮)과의 외교([[동남아시아]] 외교)에 있어서는 일본의 센고쿠 다이묘로써는 가장 이른 시기인 [[덴쇼]](天正) 연간에 [[캄보디아]] 국왕과의 선린 외교관계를 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요시자네가 캄보디아로 파견한 교역선은 덴쇼 원년([[1573년]]) 8월에 은자와 사슴 가죽 등을 가득 싣고 돌아오던 길에 [[사쓰마 국|사쓰마]](薩摩)의 항구인 [[아쿠네 시|아쿠네]](阿久根)에서 큰 풍랑을 만나 피신하던 중에 소식이 끊겼다. 또한 캄보디아 국왕이 덴쇼 7년([[1579년]]) 요시자네에게 보냈던 교역선도 거울 장인이나 ・ 상간(象簡) ・ 코끼리나 총통(銅銃) ・ 봉랍(蜂蝋)을 싣고 있었으나 그 전년도에 있었던 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로 오토모 가문보다 우위에 선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의 바닷길 봉쇄로 억류되고 만다.
 
=== 패전 ===
[[겐키]](元亀) 원년([[1570년]]), 다시금 히젠으로 쳐들어 갔으나 이마야마 전투(今山の戦い)에서 류조지 다카노부에게 동생 지카사다(親貞)를 잃었다. 류조지 가문에 있어서 이마야마에서의 승리는 국지적인 것일 뿐이었고, 이 시점에서 이미 오토모 가문의 히젠 지배를 막을 수는 없었고, 오토모 가문도 지쿠고(筑後)나 히젠의 반류조지 세력을 부추겨서 류조지에 적대하게 했지만 류조지 가문의 세력 팽창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덴쇼 4년([[1576년]]), 소린은 오토모 가문의 가독을 장남 요시무네(義統)에게 넘겨주고 은거한다. 이때부터 소린과 요시무네 부자의 이원정치가 개시되었다. 이듬해인 덴쇼 5년(1577년),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사가 [[휴가 국]](日向国) 침공을 개시하고, 소린도 출전하였다. 하지만 덴쇼 6년([[1578년]]) [[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에서 시마즈에 패하고 많은 중신들을 잃었다.
 
미미가와 전투가 발발한 원인인 시마즈 군세의 북상의 한 요인으로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에게로 망명해 와 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의 영향을 지적하는 설이 있다. 요시아키가 모리 가문의 비호를 받으면서도 모리 가문이 그를 받들고 상경할 수 없었던 것은 오토모 소린이 배후에서 모리를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에 시마즈 가문을 비롯해 류조지나 [[시코쿠]]의 죠소카베(長宗我部) 등의 가문에 오토모 가문을 공격하도록 외교 공작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소린은 쇼군의 상경을 방해하는 「6개 구니의 흉도」(六ヶ国之凶徒)로 규탄받게 되었고 주변 다이묘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리게 된다. 소린은 오다 정권(織田政権)에 접근해 이를 타파해보고자 했지만, 덴쇼 7년([[1579년]]) 무렵부터는 기쿠치 씨(蒲池氏) ・ 구사노 씨(草野氏) ・ 구로키 씨(黒木氏) 등 지쿠고 각지 세력들이 오토모 가문의 영향으로부터 이탈하고 가독을 상속받은 요시무네 역시 아버지와의 이원정치에서의 확집으로 대립이 깊어지는 등 이후 오토모 가문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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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쇼 12년([[1584년]])에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류조지 다카노부가 시마즈 요시히사의 동생 ・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에게 패하고 전사하자, 다치바나 도세쓰에게 명해 지쿠고를 쳐서 오토모 가문이 예전 점령했던 지쿠고의 태반을 오토모 가문의 영지로 탈환하였다. 그러나 덴쇼 13년(1585년)에 도세쓰는 병사했고 시마즈 요시히사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여겨 북상을 개시한다. 가신 다카하시 쇼운(高橋紹運) ・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부자의 분전으로 시마즈 군세의 침공을 늦추었으나(이와야 성 전투岩屋城の戦い)、오토모 가문 단독으로 시마즈 군세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때문에 덴쇼 14년(1586년)、소린은 중앙에서 통일정책을 추진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오사카 성(大坂城)으로 찾아가 알현하고 도요토미 가문의 산하에 들어 가는 것을 조건으로 군사적인 지원을 간절히 요청하였다. 이에 시마즈 요시히사는 그 뒤로도 오토모 가문 영지를 침공했고(부사쓰 합전豊薩合戦)、같은 해 12월에는 시마즈 이에히사의 군이 헤쓰기가와 전투(戸次川の戦い)에서 오토모 가문을 구원하러 왔던 도요토미 군세의 선발대를 궤멸시키고 나아가 오토모 가문의 본거지였던 분고의 후나이까지 공략해 왔다. 우가키 성에서 농성하던 소린은 남만으로부터 수입해 온 대포 ・ 구니쿠즈시(国崩し, [[불랑기포]])를 써서 우가키 성을 지켜냈다. 그러나 오토모 가문은 기껏해야 몇 달밖에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고, 멸망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덴쇼 15년(1587년)、멸망 직전에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의 군세가 부젠 고쿠라(小倉)에 와서 먼저 와 있던 모리 데루모토、미야베 게이준(宮部継潤)、[[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의 군세와 합류해 도요토미 군세 총 10만 명이 규슈에 도착했다. 4월 17일 [[휴가 국|휴가]](日向)의 와지로자카(根城坂)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세와 시마즈 요시히사 군세의 합전이 벌어졌다(와지로자카 전투). 요새를 지키던 미야베 게이준 등을 중심으로 하는 1만 군세가 해자를 파고 널빤지로 목책을 세우는 등 요새를 굳게 지켰고, 시마즈 군세는 이를 돌파하지 못한 채 교착 상태에 있던 차에 히데나가 휘하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5백 명과 우키타 히데이에 휘하 [[도가와 미치야스]](戸川達安)의 수세(手勢) 등이 죽기로 싸워서 게이준을 구원하였다. 결과 시마즈 군세는 요시히사의 외손자인 시마즈 다다치카(島津忠隣)、사루와타리 노부미쓰(猿渡信光)가 전사하는 등 큰 손해를 입고 패주하였다. 이 전투는 「분고에서 굳게 방어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준수하지 않고 멋대로 회전을 벌였다가 헤쓰기가와에서 패주했던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의 실패를 만회하고 히데요시에 의한 규슈 평정(九州平定) 사업을 반석에 올릴 수 있도록 했으며, 궁지에 빠져 있던 오토모 소린을 구원하였다.
 
5월 13일、히데요시는 히데나가에게 전11개조의 명령을 하달하였다. 오스미(大隅) ・ 휴가 양국의 인질들을 풀어줄 것과, 죠소카베 노부치카(長宗我部信親)의 전사를 애도하는 뜻에서 그 아버지 [[조소카베 모토치카|모토치카]](元親)에게 오스미를 내린다는 것, 시마즈 요시히사 항복의 정세、모리 데루모토、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깃카와 모토나가(吉川元長)를 사쓰마로 진을 옮기게 할 것, 시가 지카쓰구(志賀親次)의 충절에 대한 보답으로 오토모 소린의 판단으로 휴가 국내에 성을 사여할 것, 오토모 요시무네와 상담해 분고 국내의 불필요한 성은 파각할 것, 휴가 국에 있어서 오토모 소린의 지행(知行) 취급과 처분을 소린의 뜻대로 맡길 것、우키타 히데이에, 미야베 게이준,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비토 토모노부(尾藤知宣), 구로타 다카타카(黒田孝高)에게 휴가、오스미、분고의 성곽 공사 및 수리를 명할 것、부젠의 불필요한 성을 파각하고 분고 ・ 부젠 사이에 성 하나를 구축할 것、월권행위를 하지 말 것 등이었다(『오토모 가 문서록』大友家文書録).
 
소린은 전쟁 국면이 한번에 역전되고 있는 와중에 병으로 쓰러졌고, 시마즈 요시히사의 항복 직전에 분고의 쓰쿠미(津久見)에서 병사하였다. 향년 58세(사인은 티푸스가 유력하다).
 
규슈 평정 뒤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요시무네는 분고 1국을 안도받았다. 히데요시는 소린에게 휴가 국을 사여하려 했지만 통치 의욕을 잃었던 소린은 이를 사양하였다(그 명령을 받기 그 직전에 사망하였다고도 한다).
 
오토모 소린의 무덤은 [[오이타 현]](大分県)의 [[쓰쿠미 시]](津久見市) 시내와 [[교토 시]](京都市) 기타구(北区)의 류호 산(龍寶山) 다이토쿠지(大徳寺)의 탑두사원(塔頭寺院)인 서봉원(瑞峯院)에 위치해 있다. 나아가 쓰구미 시 가미미야모토 정(上宮本町)의 고류 산(響流山) 초센지(長泉寺)에 위패가 있다. 오토모 소린의 초상화는 서봉원에 소장되어 있다.
 
소린의 죽음 직후 크리스트교의 방식에 따라 장례가 치러져서 묘소가 그 자신의 저택에 마련되었으나, 훗날 요시무네가 다시 후나이의 다이와지(大知寺)에서 불교식으로 장례를 거행하고 묘지도 불교식으로 바꿨다. 그 뒤 오토모 소린의 무덤은 황폐해졌으나 에도 시대인 [[간세이]](寛政) 연간(1789~1801년)에 소린의 가신의 먼 후손인 우가키 시로토요(臼杵城豊)가 자비를 들여서 개장하였다. 쓰구미 시내에 위치한 현재의 오토모 소린의 묘소는 [[1977년]]에 당시 오이타 시장 우에다 타모쓰(上田保)에 의해 새롭게 크리스트교 방식의 무덤으로 조성되어 종래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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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위키공용분류|Otomo Sorin}}
 
{{전임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