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카프 궁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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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 ==
=== 1중정 ===
[[파일:Imperial Gate Topkapi Istanbul 2007 002.jpg|섬네일|궁전의 정문 ‘황제의 문’]]
톱카프 궁전은 세 개의 문과 그에 딸린 네 개의 넓은 중정(中庭)을 가지고 있다. 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은 ‘바브 휘마윤({{llang|ar|''Bâb-ı Hümâyûn''}})’이라 불리는 '''황제의 문''' 또는 '''술탄의 문'''(''Saltanat Kapısı'')이다. 문의 바깥쪽에 새겨진 글은 메흐메트 2세가 이 궁전의 건축을 1478년에 완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의 문은 메흐메트 2세 이후의 군주들이 손을 많이 대는 바람에 원래의 모양으로부터 많이 변형되었다. 황제의 문을 들어서면 첫 번째 마당인 '''제1중정'''(''I. Avlu or Alay Meydanı'')이 있는데, 이곳에는 오스만 군주와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고 불리는 근위대가 위치하여 별칭 예니체리 마당이라고도 한다. 일반 백성은 이곳까지만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조정의 관리나 조정에서 일하는 시종들은 일반 백성들이 드나드는 제1중정을 궁전 마당으로 여기지 않았다. 제1중정에는 진료원, 장작 저장소, 제빵소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동로마 제국 때 지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화폐 제작소 말고는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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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6세기]]경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건립되었다. 건축 재료와 구조 면에서 볼 때 전형적인 비잔틴 건축물이다.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 제국을 정복한 후에도 [[모스크]]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축물의 원래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오스만 제국은 하기아 이레네 성당을 전리품과 무기 저장소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846년에 오스만 제국 최초의 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황제의 문은 대형 버스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큼의 폭이며, 황제의 문에 연결된 중정 안쪽에는 톱카프 궁전 관람을 위한 매표소가 있다.<ref>이희철, 《이스탄불(세계사의 축소판, 인류 문명의 박물관)》, 리수. 58-59쪽</ref>
 
=== 2중정 ===
[[파일:Istanbul Topkapi Sarayi.JPG|섬네일|경의의 문]]
제1중정을 지나면 ‘바뷔스 쎌람(''Bâb-üs Selâm'')’ 또는 디완 광장(''Divan Meydanı'')이라 불리는 두 번째 문인 '''경의의 문'''이 있다. 첫 번째 문과 중정은 일반 백성도 드나들 수 있는 곳이지만, 경의의 문부터는 일반 백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경의의 문 양쪽에는 방추형의 석탑이 세워져 있다. 이 문의 오른쪽 벽에는 사형 집행자의 손과 칼을 씻었다는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문 옆에는 참수된 사람의 머리를 놓아둔 두 개의 대리석이 있었다고 한다. 경의의 문 뒤에 있는 넓은 마당은 '''제2중정'''(''II. Avlu'')으로 이곳에는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디완]] 건물과 거대한 황실 주방인 부엌 궁전(''Saray Mutfakları'')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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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오른쪽에 있는 부엌 궁전은 군주를 비롯해 궁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직분에 따라 열 개의 별도 주방을 갖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 궁중음식이 준비되었고, 해가 긴 여름철에는 해지고 두 시간 후쯤 군주와 하렘의 황실 가족들에게 음식이 제공되었다. 주방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200여 명의 사람이 줄을 서서 접시를 손에서 손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식탁에 올려졌다. 궁전의 주방에서는 주로 양고기를 포함한 육류가 준비되었는데, 하루에 양 200마리가 소비되었다고 한다. 생선은 원하면 요리할 수도 있었으나, 거의 먹지 않았다.
 
=== 3중정 ===
[[파일:Gate of Felicity Topkapi Istanbul 2007 002.jpg|섬네일|지복의 문]]
‘바쉬스 싸데(''Bâbüssaâde'' 또는 ''Bab-üs Saadet'')’라 불리는 세 번째 '''지복의 문'''은 군주와 군주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이 문 뒤에 있는 '''제3중정'''(''III. Avlu'')에서는 군주의 즉위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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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관에는 특히 14~19세기 [[중국]]과 [[일본]]산 자기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톱카프 궁전은 중국산 자기 1만 2,000점과 일본산 자기 8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중국산 자기는 [[원나라|원]], [[명나라|명]], [[청나라|청]] 시대의 것으로 청자기와 백자기가 주를 이룬다. 중국산 도자기는 9~10세기경 [[중동]] 지역에 수출되기 시작하였는데, 오스만 조정에서는 중국산 자기를 대량 수입하여 즐겨 사용하였다. 일본 자기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들여온 것으로 큐슈 지방의 아리타에서 생산된 것인데, 선적한 곳의 이름을 따 붙인 이마리 도자기가 대부분이다. 일본산 자기 중에는 오스만 군주가 특별 주문하여 제작된 것도 있다.<ref>이희철, 《이스탄불(세계사의 축소판, 인류 문명의 박물관)》, 리수. 64-66쪽</ref>
 
=== 하렘 ===
제3중정에는 남성출입금지 구역으로 알려진 [[하렘]]이 있는데, 하렘 건물에는 약 250개에 이르는 방이 있다. 오스만 제국 전성기에는 [[쉴레이만 1세]] 시대에는 하렘에 사는 사람들의 수가 1,000명에 이르렀고, 군주가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비밀 통로도 만들어졌다. 지복의 문 바로 뒤쪽에는 외국 사절을 접견하는 알현실이 있다.
 
=== 4중정 ===
[[파일:Pool on Marble Terrace (Topkapı Palace) on January 30th, 2015.jpg|섬네일|2015년 1월 4중정의 분수대]]
제4중정에는 오스만 조정 근위대의 지휘관과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궁전 학교가 있었다. ‘엔데룬’이라 불리는 궁정 학교는 톱카프 궁전 안에 설립된 관리 양성 교육 기관이었다. 궁전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주로 데브쉬르메 제도에 따라 [[기독교]]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 가정 출신의 젊은이들이었으나 오스만 고위 관리의 자제들도 입학하였다. 그들은 터키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는 물론 꾸르안, 역사, 수학, 음악 등을 배웠다. 엄격한 체력 단련을 통해 기마술과 무기 다루기에 능했으며, 궁중 내 예의범절도 익혔다. 궁전학교를 졸업하면 무사이면서 학자와 신사의 면모를 겸비하게 되었고, 건전한 무슬림인 동시에 나라에 충성하는 헌신적인 신하가 되었다. 궁정학교 출신들은 주로 오스만 조정의 행정관리로 배치되었고, 그들은 능력과 공적에 따라 고위직으로 승진하였다.<ref>이희철, 《이스탄불(세계사의 축소판, 인류 문명의 박물관)》, 리수. 67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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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그다드 쾨쉬퀴 ====
[[파일:Baghdad Kiosk at the Topkapı Palace in Istanbul, Turkey 002.jpg|섬네일|바그다드 쾨쉬퀴]]
바그다드 쾨쉬퀴(Bağdad Köşkü)는 테라스 중앙에 위치한 분수 오른쪽에 위치해있다. 이 정자는 [[1638년]] [[무라트4세]]가 [[사파비 제국]]으로부터 [[바그다드]]를 되찾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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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링크 ==
{{포털|문화유산}}
{{위키공용분류|Topkapi Palace}}
* [http://www.topkapisarayi.gov.tr 공식 웹사이트] {{언어링크|tr|en}}
* [http://www.tulpart.com/pic.asp?cmd=2&cid=5&sid=20 톱카프 궁전 사진]